거울의 숲2
하반의 11명은 드물게도 다 고루고루 친했다. 그래서 키리마루는 산지로가 다른 친구들과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친하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조금 더 가까이 지내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키리마루의 경우는 같은 방을 쓰는 두 친구들과, 산지로도 역시 같은 방의 친구나 혹은 하반의 같은 생물위원과 비교적 더 자주 어울렸다.
자, 여기서 생각한다.
그 애라면, 그 애들이라면 산지로를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
키리마루는 걸음을 멈춘 채로 고민했다.
키리마루가 보기에 산지로는 굉장히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자주 하거나 멍하니 있는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산지로와 같은 방을 쓰는 그 친구나, 혹은 좀 더 사려가 깊거나 좀 더 민감한 녀석들이라면 산지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키리마루는 그 이상 산지로를 표현하지 못했다.
그 이상 표현할 말도 잘 몰랐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길다란 나무들, 거기에 가늘게 걸쳐진 덩굴들
커다란 물웅덩이가 넓은 땅에 끝도없이 파여져 있고 그 사이는 거미줄마냥 가늘게 길을 뻗고 있다. 발을 디디는 가느다란 길에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길풀이 나있다.
더 멀리 시선을 옮기면 분명히 알고 있는 산들이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 분명 눈에 익은 곳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발디딘 곳이 어딘지는 알 수 가 없다.
여기서 인정했다. 키리마루와 산지로는 길을 잃었다. 묘한 일이지만 여하튼 미아가 된 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이상한 곳에서 산지로는 한 번 더 길을 잃은 것이다.
키리마루는 발 밑의 감각을 한번 더 확인했다.
"그래, 땅을 딛고 있어. "
제자리에서 팔도 한번 쭉 뻗어 본다.
"숨도 쉬고있고, 팔다리도 잘 움직여."
이거면 우선 된다. 키리마루는 땅을 확실히 딛고 있는 그 감각과 자신의 사지만을 믿었다.
그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식은 뭐가 문제인거야?"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다- 이게 키리마루가 내릴 수 있는 산지로의 묘한 구석에 대한 유일한 평가였다.
"산지로- 산지로! 빨리 나와, 난 네가 안 보여!!"
키리마루는 그 자리에서 버럭 외쳤다. 옆의 물가엔 역시나 키리마루의 모습만 비춰지고 있었다.
꼼짝도 안한 건 아니지만, 키리마루는 그 자리에서 다섯발자국 이상은 움직이지 않은 채 좁은 길을 오가며 산지로를 불렀다.
산지로는 이 곳에 있다. 키리마루는 그것 만은 알 수 있었다. 그저 안보이는 것 뿐이다.
닌타마의 친구-길을 잃었을 때.
첫번째. 혼자라면 길을 잃지 마라.
두번째. 동료와 헤어진 후 길을 잃었다면 동료보다 약속장소를 우선 찾아라.
세번째. 동료와 함께 있다 길을 잃었다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그러므로 산지로는 이 곳에 있을 것이다-키리마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더 섬세한 친구라면 소위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같은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키리마루는 학교에서도 세속적이기론 탑클래스였다.
"산지로!"
길을 잃은 친구를 찾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자는 하나 뿐이었다.
길을 잃었다.
하지만 이 곳에 있다. 그런데 불러도 나오질 않는다.
산지로는 돌아올 마음도 같이 잃어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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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마루는 애꿎은 땅을 퍽 찼다.
"젠장, 잃어버렸든 잊어버렸든 뭐가 뭐야. 산지로, 이 귀찮은 자식아, 얼른 안 와?!"
허공을 향하던 외침이 버럭 아래를 향한다.
필요한 건 몇 개 없다. 내 몸, 팔, 다리. 땅을 딛고 서 있다는 그 감각. 들이쉴 수 있는 바람......살아 있다는 것.
그거면 된다.그 외에 또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외엔 다 골치 아픈데다 쓸데도 없다. 그런데 이 자식은 그 쓸데없는 걸 너무 많이 생각한다.
물이 비추는 건 가까이 있는 것, 여기에 있는 것. 존재하는 것.
땅에 발을 디디고 바람을 맞는 것들. 현실에 있는 것.
이 곳의 수많은 물웅덩이들은 키리마루의 그림자만 비췄다.
키리마루는 어쩐지 너무나도 짜증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산지로, 넌 뭘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거야. 그냥....아아, 그냥 나와!!"
키리마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력을 끄집어내며 외쳤다.
"이리 오라고! 어딘지 모르겠으면 내가 있는 쪽으로 와. 너, 헤이다유랑 뭐 만들다 말았다며!!"
조금 있으면 완공이라고 그랬잖아. 왜 완성이 아니고 완공인지 무서워서 기억하고 있어.
키리마루가 그렇게 덧붙인 순간, 그는 한번 더 확신했다.
산지로는 모습이 사라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 때만큼은 키리마루도 산지로가 있다는 것을 그저 '알 수 있었다'......라고 한다면 또 조금 가슴찡하거나 신비한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키리마루는 그런 섬세함은 요만큼도 갖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헤이다유의 얘기가 나온 순간 산지로가 얼핏, 사라질 때처럼 보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본 그 얼굴은 '아차' 싶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여기 언제까지 있을거야?"
키리마루는 이 쯤이 팔이겠지, 하고 추측되는 곳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란타로한테 달리기 이길거라며."
그 순간 산지로는 다시 땅을 디뎠다.
그리고 키리마루가 손을 잡자, 그림자도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키리마루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었다.
산지로가 이런저런 말을 해주면 그렇구나, 하며 지식으로서 아는 정도다.
산지로는 반대로 키리마루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곧 아, 사라진 건 나고 지금 길을 잃었구나하고 깨달았단다.
길을 잃은 건 맞지만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또 잃어버린 거니,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우선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계속 생각하다보니 이윽고 돌아간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을 잊고, 그걸 잊었다는 생각마저 잊을 무렵에 산지로는 마지막에 들었던 물그림자를 쳐다봤다. 그림자가 하나 밖에 없어서 그걸 물끄러미 봤더니 곧 이게 누구 그림자더라 싶어 끝을 거슬러 올라가 땅을 쳐다봤고, 그제서야 뭔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키리마루를 떠올리고, 만들다 만 지하의 비밀기지를 떠올리고, 땅을 박차고 바람에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감각을 떠올렸다.
.....그랬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쉽게 찾았다. 멈춰섰던 곳에서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니 금방 아는 곳이 나왔다.
슬쩍 돌아 보니 여전히 그 이상한 웅덩이와 나무들이 그대로 있길래 시선 한 번 더 안주고 둘 다 최대한 빨리 달려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