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하로 유니버시티
어떤 얘기부터 할까......이건 11명 아이들이 중심인 캠퍼스 라이프 얘기다.
아이들은 저마다 개성이 넘치고, 또 사고를 일으키는 능력도 넘쳐났으므로 아무리 간략하게 줄여도 레포트용지 한두페이지로는 감당이 안될 사연이 많았다.
그럼 무엇부터 얘기해볼까.
역시, 많은 얘기들이 그러하듯
처음부터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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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란타로는 그래도 생각보단 헤매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미리 인쇄해온 약도를 한번 주위를 한번, 고개를 까딱이면서 캠퍼스를 걷고 있었음
란타로가 센터시험에서 이제까지의 이녀석의 모든 불운을 이를 위해 존재했나 싶을 정도로(그리고 주위에서도 그런 평가를 내리고 있다) 대박을 쳐서 들어온 이 학교는 진짜 커다랬음. 일반적인 대학 캠퍼스란 당연히 중고등학교보단 넓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이 학교는 특징적일정도로 넓었다. 물론 넓이를 제물로 편리한 교통권을 날려버렸지만.....
학교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지은게 아니라, 넓은 땅들에 하나하나씩 증축을 거듭하여 생겨나간 터라 구조상으로도 꽤 복잡했음.
계획도시처럼 한블럭, 고 스트레이트, 턴레프트 같은, 1단원에 나오는 간단한 말로는 신입생은 자기네 과건물을 찾기가 힘들었음.
대부분은 남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삐뚤빼뚤 무질서하다는게 첫 인상임. 그래서 란타로는 신입생다운 긴장감까지 더해서 몇번이고 다시 약도를 확인하며 약대 건물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향했음. 눈 앞에 있는 이 커다란 건물이 본관일까, 여기서 건물을 넘어서 꺾어야 하나 바로 꺾어야하나 하고
거리를 자세히 재보려 약도에 시선을 향한채로 문득 걸음을 멈춘 순간, 란타로는 누군가와 부딪혔음. 어어.
란타로는 순간 굉장히 놀라서 소리도 못냈지만, 상대는 작게 소리치고는 몇번 휘청, 뒷걸음질 쳤다. 상대가 빨리 몸을 뒤로 뺀 덕분에 그다지 부딪히지는 않았다. 란타로는 놀란 얼굴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상대의 키가 큰 편이라 평균치의 높이를 가진 란타로는 시선을 약간 위로 향해야했다. 아, 죄송합니다. 란타로가 먼저 사과함. 앞을 똑바로 안보고 걸었던건 자기니까.
"아니, 괜찮...아요."
상대는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서,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음. 하지만 입을 열고 무언가 말을하니, 목소리와 함꼐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인상을 준다....고 란타로는 짧은 순간 재빨리 생각했음. 본인은 잘 모르고 있지만 사람분위기나 인상을 파악하는 건 란타로의 특기였음. 그리고 그건 언제나 꽤 정확했음. 본인은 모름.
늘씬한 남학생은 괜찮다고 대답하다가 란타로가 들고 있는 종이 쪽에 눈길이 줬음. "저기, 이거 약도....에요?'
이 사람 존대를 왜 이렇게 어물쩍 거리며 붙이지. 하고 란타로 생각했지만 부딪힌 일도 있고 해서 잘 대답해줌.
"네, 학교가 넓어서....홈페이지에서 인쇄한 겁니다."
"좀 봐도 돼.....에?"
이젠 아주 뺐다. 란타로는 썩 불쾌한건 아니지만, 처음보는 사람한테 세마디 만에 말을 놓나? 싶어서 약간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내밀었다.
그런 란타로를 힐끗 보더니 남자는 지도를 받아 자기쪽으로 빙글 돌리고는, "신입생이지?" "응?"
"신입생이잖아. 나도. 동갑."
눈을 굴려가며 지도를 요리조리 살피느라 말이 짧게 끊어졌다.
누가봐도 여기 처음와서 길을 찾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며 캠퍼스를 걷고 있던 건 맞지만. 란타로는 표정을 썩 숨기지도 않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신입생인건 맞지만 동갑은 아닐 수도 있잖아. 하고 대꾸했다.
남자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그렇네 하고 숨을 삼켰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란타로는 생각했음.
"하지만 동갑이지?"
"그건 그렇지만."
"이 몸은 사람보는 눈썰미 하나는 자신있거든. 경험이 축척됐달까......지도 땡큐."
지도를 금방 돌려주고는 덕분에 빠른 길을 찾았다- 고 시원하게 웃는다.
"그렇게 잠깐 보고 바로 알겠어?"
"대충은? 난 길 찾는 눈치도 빨라." 빙글빙글 웃는다. 이 녀석은 디폴트가 웃는 얼굴이라는 걸 알 것 같았음. 웃을 때 마다 눈매가 쉽게 휘어졌음
란타로는 아무리 그래도 과장해서 말하자면 야외 미로에 가까운 이 학교 내에서 목적지로 가는 루트를 그렇게 단박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음.
"어디로 가는데? 나랑 가는 방향이 다르면 가는 부분 찢어줄게."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이를 내밀었음.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음. 그걸 보니 고양이 과 동물을 연상시켰음.
남자는 약간 탐색하듯이 란타로를 잠시 보고는 흐흥. 하고 가볍게 소리를 내더니 눈도 요리조리 한번 하늘한번 땅한번 쳐다봤다가 란타로가 짜증이 나려고 할 때쯤 태도를 싹 바꿔 씨익 웃으면서 "난 정말 괜찮아." 하고 그제서야 답했다.
"진짜로 괜찮아. 보니까 여기서 별로 멀지 않고."
"어디로 가는데?"
"사범대 쪽."
남자는 긴 손가락을 내밀어 지도의 한군데를 쿡 찍었다. "아." 란타로가 약간 한숨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이런, 조금 겹치네."
"....그러고 보니 방향이 달라야 찢어준다고 했지. 아직 길 못 찾았어? 혹시 길치?"
초면에 참 예의도 없는 말을 툭툭 뱉고 있다.
란타로는 썩 화도 안나는게, 주위환경에 잘 순응하는 자신의 성격이 이정도로나 유연했었나 생각하며 대꾸했다.
"그건 아니야. 조감도로는 금방 갈 것 같았는데, 예상 외로 건물들이 다 너무 크니까 감이 안 잡힌달까."
"뭐, 지도로만 봤다면 확실히."
"그리고 이 학교, 큰 나무가 너무 많아서 시야를 가려. 주위가 잘 안보여."
"아, 그건 동감."
남자가 능숙하게 맞장구를 쳤다. 사교성이 있달까, 사회성이 좋아보인다. 란타로는 짧은 대화 속에서도, 그런 점을 꽤나 명확하게 느꼈다.
"그 쪽은 어디로 가야하는데?"
"....약대. 약학과로 "
란타로가 손으로, 사범대보다 훨씬 더 안쪽에 있는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그 말에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약대?! 너 공부 잘하는구나!
감탄이 담긴 소리다. 이 학교의 약대는 꽤 수준이 높다는 평판이었다. 아니야, 공부를 열심히 한 건 맞지만 그보다는 딱 한번 친 시험에서 신이 내린 덕이 더 컸답니다....
그래서 오긴 왔는데 앞으로가 걱정이라서 말이다. 란타로는 살짝 눈물이 날 것만 같은 한탄을 속으로 삼켰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할 얘기는 아니다.
남자는 헤에-하고 노골적으로 '꽤 한다'는 눈빛을 란타로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도까지 가지고 길을 못 찾아? 하는 시선도 담겨있었지만 란타로는 단호히 무시했다.
곧바로 란타로는 이 쭉뻗은 녀석과의 영양가 없어보이던 인연이, 사실은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하게 되었음.
녀석은 란타로와는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쪽이 바로 란타로가 가야할 약대 방향이었음.
쭉 뻗은 녀석은 더 안쪽의 다른 건물에 우선 들렀다가, 얼추 미리 기억하고 있던 지도와는 역방향으로 오게 되는 바람에 잠시 헤매던 차에 란타로와 부딪힌 거였음.
지도를 다시 보고서야 그 쪽도 아, 아까 멀리 지나친 그 건물이 사범대구나, 하고 깨달은 것.
둘은 10분가량 같이 걸었고 헤어진 이후에 란타로는 남자가 알려준 길 대로 무사히 걸어가 약대건물에 도착했음.
헤어지기 전에, 상대가 약간 극적으로 코트를 펄럭이며 몸을 빙글 돌리고는 물었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 쪽 이름이 뭐야?"
얼굴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 채였음.
어째 약간 과장된 듯한 행동거지가 묘하게 웃음이 나고, 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란타로가 답했음.
"이나데라 란타로."
"그래, 이나데라 씨. 난 셋츠노 키리마루라고 해."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 때는 번호라도 교환합시다- 하고 키리마루는 손을 흔들고는 펄쩍펄쩍 뛰어 건물 안으로 사라졌음.
갑자기 시끄럽던 옆이 조용해지자 어쩐지 돌풍이 불어왔다 가버린 것 같아 란타로는 순간 멍해졌음.
란타로는 주위에 잘 휩쓸리는 성격이라, 저런 타입에 딱 약했음. 저렇게 사람 잘 다루고 휘두르는 타입에.
아까도 말했지만, 란타로는 본인은 잘 모르지만 사람 파악을 잘 했음. 본인은 파악한다는 생각조차 없지만.....
저런 녀석이 가까이 있다면 있는 내내 자기 머리가 딱딱 아파올거라는 데 지금 지갑에 들어있는 부적을 걸 수 있었음. 용한 부적임. 학업증진 부적으로 센터시험에 대비해서 부모님이 멀리서 사다주신건데,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사람들 모두가 란타로 대신 이 부적이 시험을 쳤다고 여기고 있음.
안 그래도 자기 능력보다 한단계 높을 곳에 와서 앞으로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할 판에 저런 귀에 대고 나팔 불 녀석이 가까이 있다면, 큰일이 날 거임.
다음에 만나면, 이라.
란타로는 부슬부슬한 머리를 팍팍 문지르며 이 넓따란 캠퍼스에서, 것도 꽤 거리가 있는 다른 학과 학생들끼리 서로 부딪힐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음.
의외로 단호한 데가 있는 란타로는 물론 만나도 번호는 안 교환할거라고 생각했음. 무엇 때문에 이 창창한 캠퍼스 라이프에서 남자 번호 따위를 캐내야 한단 말인가?
란타로는 그런 결심을 하며 발걸음을 옮김.
무슨 말도 그리 많은지 10분 내내 귀에서 나발불던 애가 사라지니 그제서야 란타로는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음. 시끌벅적한 소음도.
그러고보니 그 녀석이 뭐라고 했었지. 입학날부터 3~4주 가량은 동아리나 학교 내 단체의 가입권유기간이라 가는 길이 시끌벅적할거라고.
동아리.
그러고 보니 이 지도를 인쇄하면서 놀랐던 건 동아리 건물이 5개가 넘는다는 것이었다.
체육계 동아리가 주로 몰려있는 대운동장 방향의 A동, 대공연장 쪽에는 공연 음악계의 B동, 종교계통을 죄다 몰아넣고(무슨생각인지 모르겠다) 거기에 봉사활동 계열이 많은 C동, 기타 동아리가 있는 D동, 학생본관의 건물을 함께 쓰는-이쪽은 주로 역사가 오래된 동아리나 단체- E동
딱 자른 구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이렇게 분류되는 듯 했다.
또 그 갯수는 어찌나 많은지..........홈페이지에서 호기심에 동아리 목록을 봤다가 쫙-늘어나는 스크롤에 질려서 금방 다른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러고보니 미처 신경쓰지 못했는데, 들어온 입구에서 보았던, 그 시끄럽던 행렬이나 권유도 모두 동아리 권유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형탈같은 것도 쓰고 있길래 신입생 환영 이벤트라거나 근처 학원의 영업이거나....그런 줄 알았지. 지도에 코를 박고 있느라 미쳐 자세히 신경쓰질 못했다.
학교 정문이나 후문에서도 성행했지만, 학생본관을 중심으로 넓따란 광장에 온갖 색색의 천막들이 자리잡고 앉아 마치 축제를 연상시키는 모습은 확실히 신입생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일단은 과에 가야하니 광장의 끝을 스쳐지나가면 걸음을 재촉하지만 아무래도 시선이 힐끗힐끗 향한다.
동아리라.
나는 다니는 내내 공부에 전념해야겠지만 가끔씩 활동해도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좋은 동기라거나, 좋은 선배라거나.
란타로는 무언가 가슴속에서 간질간질한게 차오르는 것 같아 쑥쓰럽게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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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 했어요. 주인 아주머니 좋은 사람 같던데요.
에이, 또 그 소리세요. 자취가 훨씬 낫죠. 하숙해봤자 돈은 더 비싸지 세끼 밥 다 먹을지 안 먹을지도....
아뇨, 아니에요 밥 먹어야죠! 네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밥 꼬박꼬박 먹어야죠 식비는 안 아낄게요. 세끼 쌀밥 먹을테니까요. 예이예이 제가 입을 잘못 놀렸습니다요 옙옙.
아 됐어요. 선생님도 바쁘잖아요. .....그럼 있는 수업을 째고 오실거에요? 사전에 미리 다 해놨잖아요. 오늘 들어가기만 하면 됐던건데.
네 괜찮아요. 석달전부터 그렇게 수선을 떨면서 구했잖아요. 통학거리도 적당했어요.
자전거나 중고로 한대 구해볼까 해요. 통학도 통학인데 아 역시, 선생님 말씀대로 교문을 통과해서부터가 문제더라구요. 진짜 학교 완전 넓어요.
네..네. 아 선생님 때도 그랬어요? 이야아 몇십년전 일이야. ......아 십년까진 아니죠 옙옙. 제 주둥이가 참, 요놈요놈
아아. 네. 선생님 말씀대로 가봤어요. 어우 말하니까 엄청 반겨주던데요? 네. 제가 갈 땐 자리엔 없었는데 선생님 기억하는 사람이 있대요. 차도 얻어먹고 잘 있었는데.....으음...
저기....선생님, 거기 멀쩡한 곳 맞지요...? 아, 네. 네네. 으음 역시 선생님도 좀 그렇게 생각하셨군요...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이었어요.
동아리 권유하는 곳까지는 안 가봤어요. 네...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아서, 얼른 나왔거든요.
돌아가다가 길을 좀 헤맸는데.....아, 그러고보니까요. 어떤 애랑 부딪혔는데.
키리마루는 휴대폰을 든 채로 짧게 웃었다.
지도를 가지고 있길래 좀 보여달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쿡쿡 하고 아주 잠깐, 웃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그 짧은 순간을 알아챘는지 호기심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래, 그런데?
다 보고 돌려줬더니, 제가 가는 부분을 찢어주겠다고 했어요. 자기도 헤매고 있었으면서.
어어....그러니까,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에요.
그 때의 란타로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조금 말을 골랐지만, 상대는 금방 알아들었다는 듯 답했다.
키리마루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선생님이 조금 생각나더라구요.
쿡쿡, 유쾌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