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하로 유니버씨티_03_부티가 부티부티
쁘띠쁘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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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마루와 란타로는 커피시간의 신입생 환영회에서, 바로 이름까지 텄음.
신입생 환영회는 2주차 금요일 저녁에 열림. 커피시간은 3주차엔 다른 단체에 홍보자리를 양보한다고 함. 그래서 이걸로 대외적인 모집은 끝.
대학로의 가게 하나를 예약해서 동아리가 한쪽을 완전히 차지함. 보아하니 다른 쪽 자리도 환영회인 듯, 이 가게를 비롯하여 이 시즌이 대학로의 성수기간 중 하나라고.
그리고 광란의 기간 중 하나이기도 해. 늦게 나가면 막 길 걷는데 발에 사람 채이고 그런다? 란타로는 맞은편에서 설명해주는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음. 난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홍보기간에 몇번 홍보천막에 들러서 일을 도왔기 때문에 얼굴을 이미 익힌 사람도 있었고, 또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음.
그리고 아는 사람의 대표중 하나, 키리마루는 란타로의 옆에 앉아 있었음.
가입날 전화번호를 교환한 후, 키리마루와 란타로 두 사람은 며칠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그 때부터 키리마루는 은근슬쩍 이나데라 란타로씨~ 란타로 씨~ 란타로 쨩ㅋㅋ같이 장난처럼 란타로 이름을 포함해 답을 하곤 했음. 그래서 금요일 저녁, 동방에서 키리마루가 뭔가 말하다가 슬쩍 성을 떼고 안 그러냐, 란타로? 하고 불렀을 때도 마치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었음.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은근슬쩍 말을 놨지, 하고 생각하면서 란타로는 그래, 키리마루. 하고 한숨쉬며 대답했음.
키리마루가 란타로의 어깨를 탁탁치며 와하하 웃었다. 이제 명실공히 친구가 되었음.
그리고 이 동방은 대체적으로 선배는 대부분 후배를 이름으로 부르는 분위기란 것도 매우 컸음.
그럼 우선 건배-! ......같은 구호가 나오기도 전에 이 대학생들은 막 시켜서 막 퍼먹고 마시고 있었음. 아직 음식도 안나왔는데 기본안주로 막 잔을 비워대고 있었음
큐사쿠가 신입생들이 어색해하니까 좀 인사도 하고 정리도 하면서 마시라고 잔소릴 하고 있었지만 모두의 귀에는 그다지 들리지 않는 것 같았음.
물론 물건너서는 이런 환영회를 하지 않겠지만 그걸 다 생각하자니 마음이 참 아파서 막 감ㅠㅠ
그리고 뭣보다 신입생들은 그런 식으로 어색하지는 않았음 왜냐면 옆에서 맞은편에서 대각선에서 아이고 우리 신입생! 뉴비!! 새싹!! 이러면서 끌어안고 잔 따라주고 안주 접시 당겨주고 막 먹여주고(자~아-해./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아뇨 진짜 제가..진짜 괜찮거든요 정말우웁) 아이고 우리 새 강아지들이야~? 이러면서 난리에 난리도 아녔음
뉴비들 이뻐하는 선배 많다고 하더니 정말이었음
특히 키리마루는 키리마루대로 '그' 동아리 OB 지인이라고 관심이 지대했고 란타로는 란타로대로 소문의 커피동호회를 이끌어갈 혜성, 카페라떼 신입생 걔가 얘라면서 머리가 벌써부터 먼지떨이마냥 헐클어졌음. 특히 벌써 한잔씩 들어갔다고 아주 노골적으로 덕심을 표출하는 사람이 많았음. 란타로는 사람들이 하도 머리를 만져대서 마실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면서 주는대로 넙죽넙죽 받아 먹었음. 아이고 잘 먹는다. 그래, 많-이 먹어! 많이 시켜줄게. 주위에서 선배들이 매우 기뻐하였음
다른 선배들도 그렇지만 특히 사콘이 애들 입에 뭐가 들어가는지 안들어가는지 매 마냥 지켜보고는 입에 집어 넣어주고 채워주는데 집중하고 있었음.
눈이 살짝 풀렸는데도 인상을 쓰면서 젓가락이나 잔 움직이는거 따라서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이는게 살짝 호러블했음.
옆에 있던 키리마루가 살짝 건드리면서 너무 빨리 마시는거 아니냐고 몇번 깨워주지 않았다면 란타로는 그 압박에 무한정 들이붓고 있었을 거임.
그 때, 내가 하사하는 달걀말이를 감히 거부하냐고 애들한테 윽박지르고 있던 사콘 등짝을 탁 친 큐사쿠가 드디어 폭발했는지 고함을 뺵 쳤음.
"아 진짜!! 제대로 인사하나 안 하고 이렇게 그냥 떠들기만 하알꺼에여?!!"
폭발이 아니라 드디어 잘 취한 거였음..... 그 주범으로 보이는, 병을 들고 큐사쿠 잔을 또 채워주던 타카마루가 옆에서 낄낄낄 웃었음. 이 양반은 평소에도 늘 반쯤 풀린 낯이라 조금 붉어진거 외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음.
"맞네- 각자 처음 보는 사람도 있을거고. 간단히 이름이라도 소개해야지 않을까."
뭐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맞은편에서 토나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현재 이 중 가장 최고참은 타카마루지만, 이 동아리에선 어지간한 위기상황이 온다해도 저 사람한텐 중책을 맡기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타카마루가 그럼 우리 네쓰비 먼저-!! 하고 외치는 꼴을 보고는 1학년들도 모두 납득했다.
까마귀 떼마냥 시끌시끌하던게 한순간 가라앉고, 신입생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 분위기에 몇 잔 들어갔음에도 살짝 얼어붙은 꼬꼬마들을 향해, 카즈마가 웃으면서 '앉아서 해도 괜찮아.' 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와, 긴장했다~''귀엽다~' ' 우우 잘생겼다! '멋지다!' 같이 머리 빈 소리들이 우우 따랐다.
"저...1학년 이나데라 란타로입니다. 약학과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소리는 곧바로 네쓰비이이이ㅣㅣ 카페오레!!! 아냐 쿤타타야!! 우리 마스코트!! 강아지! 강아지 같다!!! 하는 함성소리와 왁자한 박수소리에 금방 묻혔다. 다른 동아리도 모두 이런 분위기일까? 그렇다면 동아리 문화라는건 일치감치 대학생활에서 제거해주는게 교양있고 문화적인 대학생 육성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란타로는 차암 잘했다고 칭찬하고는 또 자기 입에 사과조각을 밀어넣어주는 사콘을 슬쩍슬쩍 밀어내며 그런 생각을 했음.
이윽고 바로 바톤을 이어 키리마루가 싹싹하게 자기 소개를 했음. 유아교육과 1학년 셋츠노 키리마루입니다. 커피는 잘 모르지만, 선배한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굉장히 바람직하고 활기찬 인사다. 우와아 하는 박수소리가 왁 터져나왔다.
"이야, 요즘 1학년들은 말 엄청 잘한다!!"
"맞아, 큐사쿠는 작년에 긴장해서 앞에 잔도 없고 그랬..."
"1년이나 지났으면 좀 잊어요!!"
헤롱헤롱한 상태면서도 귀신같이 자기 욕은 알아들은 큐사쿠가 토나이를 향해 완두콩을 던졌다. 다른 선배들도 그거 기억난다며 웃는다. 상하관계같은게 여실히 보이는 그 모습이 굉장히 유쾌하다. 또 금새 산만해져서는 작년 환영회 때는- 하고 얘기가 나오려는 걸 카즈마가 아직 소개가 남았다며 시선을 돌렸다.
얼굴색이 창백하고 어딘가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마른 체구의 남학생이 쏠린 시선을 티나게 부담스러워 하며 입을 열었다.
"국문학과의....니노츠보 아야카시마루, 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뒷 말은 거의 속삭임이었다. 점점 내려가는 볼륨을 따라 듣는 이들도 점점 소리를 죽이고 말이 끝날 즈음엔 완전히 침묵했다.
"..................더헛!!!!!"
"으악!"
"엄마야!"
"깜짝이야!!!" 누군가 긴장감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르자 금새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어우 방금 뭐야 어깨를 털어! 어서 어깨를 털어야해
바보같은 소리가 몇마디 나오다가 또 이윽고 웃음이 터진다. 1학년, 아니 아야카시마루 긴장했어~ 귀엽다~ 선배들이 떠든다.
사콘은 그제서야 조금 구석에 앉아있는 아야카시마루를 발견했는지, 너는 진짜 잘 좀 먹어야한다며 음식 그릇을 하나 안고는 아예 그 옆으로 이동해버렸다. 란타로는 딱 봐도 소식할 것 같아 보이는 동기의 위장이 걱정되었지만, 또 감히 내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생략) 하는 선배를 썩 말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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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창백한 데 더욱더 핏기가 가시는 얼굴로 선배의 하사품을 받아먹는 아야카시마루를 뒤로하고, 그 반대 쪽에 앉아있던 신입생이 입을 열었다.
후쿠토미 신베입니다. 경영학과에요.
굉장히 넉살 좋아보이는 웃음이다. 사람도 좋아보인다. 와- 하고 박수가 나오는 데, 그 사이로 큐사쿠가 무척이나 기특하다는 음성으로 "쟤가 걔에요. 왜, 목요일에."
"목요일에?"
"시음회에서 커피 종류 다 맞췄다던."
"오오!!"
와- 하는 감탄소리가 터져나왔다. 우와 기대주다네! 이번 신입생은 장난 아닌데!!
평소에 커피 좋아했냐는 질문에 신베는 자기는 먹는 건 다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아하, 과연.
취하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지는 남 배 채우기 전문인 사콘도, 신베한테는 그다지 작업을 걸지 않고 있었다. 굳이 자기가 챙겨주지 않아도 신베는 다람쥐마냥 앞에 놓인 그릇과 잔을 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그릇으로..... 아무리 봐도 회계가 큐사쿠 선배 같은데, 신베와는 가장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어서 신베 쪽의 전쟁터 폐허마냥 처참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나갈 떄 큰일 나겠구나.
신베의 맞은편에 앉은 아야카시마루는 어쩌면 사콘이 달라붙기 전까진 제대로 못 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 먹어본건 다 기억하거든요~ 수업 내용 같은건 기억 안나는데."
사람 좋게 웃는 모습에 주위도 따라 웃는다. 맞아 진짜 기억 안나지~
란타로도 피식 웃으면서 키리마루를 툭 쳤다.
"표정이 왜 그래."
"응? 뭐가?"
도리어 정색을 떨면서 돌아본다.
"뭔가 얼굴이 어색하잖아."
"......내가 남한테는 눈치 빠르단 얘기 잘 안하는데."
나도 그런 얘기는 그다지 들어본 적 없어. 란타로가 대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뺀질뺀질하게 얘기도 하고 농담도 걸고 하더니, 신베가 입을 연 순간부터 묘하게 표정이 굳었다. 분위기에 맞추고는 있지만 영 딱딱해 보이는게 티가나서, 란타로가 신경을 써줬더니 도리어 왜 그러냐고 시침을 뚝 떼는 것이다.
그럼 커피 이름은 어떻게 외우는거야? 야야 그걸 왜 외워, 자동입력인거지. 그 새 또 집중력을 흐트러트리고 산만하게 다른 얘기를 꺼내든 선배들 사이에서 키리마루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녀석, 한번 본 적 있거든."
"너 학교 곳곳에서 플래그를 세우고 다니는구나."
"어허, 남들 들으면 오해할 소릴...... 학생지원과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학생지원과? 란타로서는 조금 생소한 이름이다. 대학 본관에 있는 곳이던가.
"그런델 왜 갔는데?"
"나는 장학금 때문에."
"장학그음?!"
입을 딱 벌리는 란타로를 보더니, 키리마루가 노골적으로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너무한거 아니냐?
"그런 캐릭터로는 전혀 안 보이는데."
"그건 스스로도 납득하는 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무슨 귀신 본 것마냥 말이지."
투덜대며 짧게 말하기를, 바닥에서 놀다가 고등학교 후반에 맘 잡고 빡세게 했다고 한다. 그 때 고생담은 떠올리기도 싫다며 두어번 진저리를 쳤다.
"여하튼 그 고생담의 해피엔딩을 위해 관련 서류를 떼러 갔는데 저녀석이 있더라고."
"후쿠토미 말이지."
"그래, 나는 내가 받을 거 때문에 갔었는데, 저녀석은......."
키리마루의 얼굴에 아주 순간, 살짝, 무어라 표현하거나 설명하거나 이렇다고 정의하기 힘든,
그래도 그나마 아주 비슷한 느낌의 단어를 쓰자면 조금 씁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표정이 아주 짧게 스쳐지나갔다.
"저녀석은 기부금의 서류를 가지러 왔다고, 담당자한테 묻더라고."
그거 여기서 떼는거 맞냐고 말이야.
란타로는 키리마루의 경우만큼 놀랐다. 뉴스에서나 보던 아주 먼 곳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바로 가까이.... 옆 테이블에 그 당사자가 떡하니 앉아 땅콩을 다섯접시 째 까먹고 있다니.
".....어째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얼른 안 다가오는 에피소든데...."
"네가 소시민이면 나는 초 소시민이라구. 귀로 똑똑히 들은데다 직접 얘기도 해봤으니 확실해."
신베의 아버지가 학교에 기부를 했는데, 기부 증명 서류가 필요해서 왔다고 한다. 그건 학생지원과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는 대답을 듣고, 우연히 금방 자기 몫의 서류를 떼서 나가던 키리마루와 길이 겹쳐 그런 얘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고 했다.
키리마루는 손에 든 컵을 몇번 만지작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그냥 옆에 있을 땐 그려러니 했는데."
그냥 다시 얘기도 듣고 목소리도 들으니, 소시민 대표인 키리마루가 이전에 '정말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던 그 떄의 놀라움을 문득 떠올렸다는 그런 정도의 얘기다.
"뭐어...나는 돈 타려고 아등바등하며 여기 왔는데, 그 반대도 있구나.....하는."
진짜 별거 아닌 얘기지.
잔을 기울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덧붙였다.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게, 웃으려고 했지만 살짝 실패한 것 같다는 인상이다. 란타로는 신경쓰이게 했다고 가볍게 사과하는 키리마루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주 컵을 비웠다.
아직까지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키리마루와 자신은 만나온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입 밖으로 꺼낸 이야기도 너무 적었다.
이 이상은 시선을 두지 말고, 그 안까지 보려고 하지 않는게 좋다.
아직까지는.
란타로는 조금 소리가 나도록, 컵을 내려놓았다.
"건축학과의 쿠로카도 덴시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 명 더 있었다. 신베를 두고 떠들던 온갖 소리가 어느새 잦아드는가 싶더니 또랑한 얼굴을 한 남학생이 마찬가지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또랑또랑해- 하고, 이제 슬슬 제대로 심신이 풀린 듯 반쯤 맛이 간 목소리가 실없이 대꾸했다. 너 취했어, 하고 웃는 목소리가 하나, 그리고 곧 박수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에 큐사쿠는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오늘은 전원이 다 모인건 아니지만 곧 천천히 다들 볼 수 있을테니, 누구든 보면 인사를 해주고- 하는 등의 상식적이라면 자리에 모두 앉았을 가장 처음 했어야 할 짧은 연설을 읊었다. 물론 귀담아 듣는 이는 없었다. 큐사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일치감치 포기한 어조로 대충 마무리하고는 '마시고 죽읍시다, 그러나 시체는 스스로 움직이세요 우리 동아리는 의리같은거 안 키우니 알아서들 하시라' 는 말을 아주 순화해서 말하고는 타카마루가 채워준 잔을 들고 쭉 들이부었다.
"예아!"
"부회장이 허가했다!!"
"마셔라!!"
"저기요, 이거 좀 추가해주세요!!"
이미 충분히 달아올랐던 분위기에, 해야할 일도 해치웠다는 느낌에 이 소란스러운 동아리는 다시 시장바닥마냥 떠들기 시작했다. 주로 1학년들을 붙잡고 내 잔을 받으라느니 수청을 들라느니 하는게 주 소음이었다. 그래서 디롱디롱하는 기계음을 흘리며 열리는 입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기소개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아까는 긴장해서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잔을 잔뜩 받고 조심스럽게 마시고 있던 덴시치의 머리 위로, 갑자기 팔 하나가 탁 올라왔다.
밑에 깔린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묵직한 무게감에 덴시치가 큽, 하고 입가에 댔던 잔을 떼고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상당히 화끈했는지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덴시치의 머리 위에서 멍하고 높낮이가 적은 목소리가 나왔다.
"헬로~"
"아야베 선배!"
"우와, 아야베 선배! 오셨어요?!"
"키하치로 군!!"
괜찮냐고 가까이에 있던 키리마루가 티슈를 건네주자 덴시치는 여전히 작게 기침을 하면서 티슈를 받아 눈가를 문질렀다. 원인인 아야베는 사과의 의민지 뭔지 덴시치의 머리를 두어번 꾹꾹 눌렀다. 덴시치는 아야베를 처음 본 듯, 이게 무슨 폭력인가 싶기도 한데 다들 친근하게 선배라고 부르니 말도 못하고 어색하게 아...안녕하세요...하고 어물어물 인사했다. 아야베는 응, 하고 짧게 대답하더니 곧 큐사쿠 쪽으로 걸어갔다.
"일이 일찍 끝나서 왔어."
"연락이라도 미리 해주셨으면 자리 만들어 놨을텐데요."
"했는데."
".......죄송합니다."
큐사쿠가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이고 싶은 표정을 보아하니 부재중 통화가 확실히 찍혀있는가 보다.
아야베는 약간 좁은 자리에 어기적어기적 끼어들어서, 타카마루의 옆에 자리 잡았다. 타카마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야베의 팔짱을 끼고는 기대면서 기다렸다는 둥, 보고 싶었다는 둥 고양이마냥 부비적댔는데 신입생들이 토끼탐정같은 눈으로 그걸 바라보는데에 비해 다들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그게 일상적인 풍경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모두 신경을 안 쓸 정도로 정신이 나갔거나.....
하지만 분명 타카마루의 휴대폰에도 부재중 통화가 찍혀있을 거라고, 주위사람들은 아야베의 뚱한 얼굴에서 추측했다.
"다들 전화를 안 받아서."
아야베가 안주고 뭐고 없이 바로 두잔을 내리 원샷한 다음 요만큼도 변하지 않은 어조로 내뱉었다.
"그래서 전화를 받는 사람한테 연락했어."
"누구한테요?"
"나한테."
란타로는 정말 깜짝 놀랐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린 동시에 가벼운 손이 란타로의 어깨를 툭 짚었다. 까서 이제 막 입에 넣으려고 들고 있던 완두콩을 놓칠 뻔한 란타로는, 심장이 한번 팔딱 뛰었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봤다. 란타로는 앉아있고 상대는 서 있는 탓에 고개가 한참 올라갔다.
정장을 입은, 피부가 하얀 남자가 란타로의 뒤에 서서 웃고 있었다.
"키하치로가 삐져있길래 자리 중간에 나왔어."
"타치바나 선배!"
얼굴선이 매끄러운 사람이었다. 키가 아주 큰 건 아니지만 몸이 굉장히 늘씬해서, 정장이 잘 어울렸다.
타치바나 선배, 라고 불린 그 사람은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란타로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고는 씨익 웃었다. 눈꼬리가 가늘어서, 같이 끝이 살짝 치켜올라간 눈매라도 키리마루와는 인상이 엄청 다르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테이블이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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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등장한 선배의 이름은 타치바나 센조라고 했다. 지금은 졸업했고, 교수들과 주위의 적극 추천으로 대학원에까지 들어가 교수들 밑에서 총애를 받으며 신나게 부려먹히는 중이라고 한다. 졸업 후엔 이래저래 바빠져서 이전만큼 제대로 들르지는 않지만 왕년 동아리 회장직도 맡았었고 전체 학교의 학생회에도 속했었다고 한다.
성적도 좋고 인맥도 넓어, 이래저래 예전에도 지금에도 엘리트마냥 잘 나가는 선배라 자랑하기에 딱 좋다나.
확실히 풍기는 분위기도 나는 매우 지적인 사람이라는 오오라가 팍팍 흘러나오는 것 같다.
지적인 사람이 란타로의 옆에 쑥 들어와 앉았다. 란타로의 옆 자리는 좀 전, 사콘이 아야카시마루 쪽으로 가버린 바람에 계속 빈 자리였다.
자리에 털썩 앉는 폼이, 깔끔한 이미지에 비해 행동거지는 남자다웠다. "안녕."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표시로 가볍게 란타로에게 인사를 하고는 금방 새로 가져다 준 컵을 잡았다. 란타로는 우물쭈물하다가 자기 바로 앞에 병이 있는 걸 보고 들어 컵을 채워주었다.
센조는 아주 자연스럽게 "고마워." 하고 받았는데, 그 말투에 란타로는 어째 상전을 모시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에도 갑작스레 등장한 선배 앞에 사바나의 짐승떼들은 꺅꺅거리느라 소란스러웠다. 센조는 요리조리 사람 말 같은 것만 받아서 대답해주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역시 선배라, 이런 상황에 익숙한가보다- 하고, 1학년들은 매우 감탄하였다.
그러다가 센조는 조금 떨어져서 여전히 타카마루에게 붙잡혀서 뚱한 얼굴을 하곤 물처럼 컵을 들이키는 아야베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도 회장님 화가 안 풀리셨어? 다들 너무 한거 아니냐."
우리 회장 성격이 얼마나 섬세하신데 좀 소중하게 대해줘야지. 하고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에 선배들도 따라 웃었고 신입생들은 울 뻔했다.
".....회장이요?"
"어?"
아직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덴시치가 힘겹게 입을 열어 묻자, 센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큐사쿠 등의 회장단 라인 쪽은 갑자기 실내에 왠 파리가....... 아이고 이 떡꼬치가 아주 입맛을 당기네.....하며 급작스레 딴청을 피우며 센조와 신입생들의 시선을 살살 피한다.
"2주나 지났는데 아직도 회장이 누군지 말을 안했단 말이야?"
"아니, 말하면 애들 도망갈 것 같아서."
"탈퇴하지 못할 분위기를 팍팍 만든 다음에 말해주려고 했죠."
"지금 분위기에서 활동 못하겠다고 하면 반역죄인될 것 같은 무드를 만드는거져."
"우리만 이 양반을 감당하긴 억울하잖아요? 안그래도 굳이 회장만 문제 있는게 아닌데..."
곳곳에서 신입생들의 복장을 터트리는 소리가 줄줄히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보니, 아무리 그래도 2주 동안이나 이 동아리의 회장이 누군지 스스로도 물어보질 않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항상 뭐든 큐사쿠나 토나이가 앞서서 이것저것 챙겨주거나 설명해주거나 하면서 의식적으로 질문을 차단한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키리마루와 란타로는 아야베를 한 번 눈 앞에서 분명히 봤으므로, 이 때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걸 떠올려보니 확신범이 분명하다.
입을 딱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란타로들의 시선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큐사쿠가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이야아 오늘따라 잘 넘어가네에.
뭐, 후배를 생각하는 선배가 많다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들을.......
"그렇게 됐으니....으음, 새삼스럽지만 신입생들에게 소개합니다."
"올해 커피시간의 회장을 맡은 아야베 키하치롭니다."
카즈마가 몇번 헛기침을 하더니(딱 봐도 동참했다) 정말 새삼스럽게도, 신입생이 들어온지 2주만에야 동아리의 회장을 소개했다.
그동안 회원들에게 존재를 철저히 숨겨진 회장 역시 뻔뻔스럽게 브이자까지 그려가며 인사했다. 아까까지 나온 말들이 자기 욕이라는 걸 알고는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다시 소개하자면, 아야베 키하치로, 토목과 4학년. 올해 커피시간 회장. 작년엔 부회장이었다. 의외로 운동신경이 좋아서 총동아리 체육대회 같은게 열리면 포인트를 왕창 가져와주는 게 동아리에서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한다.
"나참, 너네들은 어째 해가 갈수록 더하냐?"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 기수 때는 더했다고 들었는데요."
"누가 그래?"
"다른 선배들이."
"걔들 말은 90퍼센트가 헛소리야. 10퍼센트는 개그고. 그러니 내 말만 믿어."
센조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타카마루가 그 말에 신나게 웃어재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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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냐는 걱정에 센조는 괜찮다고 웃어보였다. 이렇게 빠져나올 핑계라도 없으면 그 노친네들은 하염없이 사람을 붙잡아 두려 한다나.
그 노친네들은 센조를 정말 싹싹하고 예의바른 학생으로 알고 있으니까 애제자로서 붙잡아 두려고 하는 걸텐데. 노친네란 분들은 너네 교수들 시험 채점할 때 사실 이렇게 하는거 아냐면서 자기들 뒤통수 치는 이런 제자의 모습은 모르고 계시겠지. 란타로는 센조가 왼손도 오른손마냥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몇번 팔을 부딪혔다.
갑자기 란타로가 알았다. 아, 이래서 아야베 선배가 일부러 사이토 선배 옆에 가서 앉았구나. 나중에 올 사람을 위해 빈자리가 하나 남아있도록 말이다.
으음.....선배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선배가 맞는가 보다,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센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왜..왜 그러세요?"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기도 했지만 이내 란타로는 센조의 눈이 자신의 얼굴보다는 그보다 조금 위쪽, 머리통에 가있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이 생긴건 멀끔해 보이는 사람도 역시 이 동아리에 소속된 사람이었나.....!!!
란타로에게 내재된 방어본능이 저절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가드하려는 걸 란타로는 이성으로 간신히 눌러참았다.
"에.....이름이."
"이나데라 란타로입니다."
"그래, 란타로."
역시 이 동아리 사람들은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다.
굉장히 친근감 넘치는 분위기긴 한데, 여기에 너무 익숙해지면 자신도 바깥에 나가서 곤란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긴 조명이 좀 어두워서 자세힌 안보이는데....머리카락 색, 원래부터 그래?"
"원래부터 이래요."
"호오."
그럼 6...아니 5년만인가. 기타같은 거 치면 여자들 여럿 울릴 것 같은 손을 들어 하나 둘, 손가락 셈을 한다.
"뭐가...요?"
하늘같은 선배한테 우물우물 물어보자, 그 선배는 눈웃음을 씩 짓고는 란타로의 머리카락을 몇가닥 쓸어넘겼다.
너랑 비슷한 애가 한명 있거든, 내 동기 중에서. 아마 가입동기도 비슷할거야.
센조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아마도 그렇게 웃게 만드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나이가 들면 이전만큼은 자주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 놀 수 있을 때 놀고, 만날 수 있을 떄 만나두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 당장 옆에 있어도, 사실은 조금만 걸어가면,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만날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나 힘들다고 한다.
"......그 선배도 끌려왔나요?"
란타로가 문득 물었다.
그 말에 센조가 킥킥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아. 지나가다가 납치당해서 그대로 신청서에 사인."
"누구신지 궁금하네요."
"꼭 머리색만이 아니라도, 너랑 닮았어. 분위기 같은거랄까."
만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다. 왜냐면 그 사람은 의대생이라 아직 졸업하지 않고 바쁜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단다.
성실한 성격이니까 아마 몇 번은 얼굴 볼 일이 있을거라고 선배는 웃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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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리하자면, 커피시간의 올해 회장은 아야베 키하치로, 토목과 4학년으로 작년엔 부회장이었다. 작년에도 하는 일은 없었지만 올해도 썩 하는 일 없는 회장으로서 1년을 최선을 다해 할 일 없이 보내겠다는 포부를 사전에(작년 말에) 밝혔다고 한다. 보기와는 달리 힘도 세고 운동신경도 있어서 총동아리 체육대회 같은게 열리면 포인트를 쓸어오는 것 이외에는 달리 동아리에 기여하는 바는 없다.
부회장은 노세 큐사쿠, 영문학과 2학년. 작년, 신입생일 때에도 능력없는 부회장 대신 어영부영 동아리의 일을 도우게 됬던 탓에 올해 부회장이 되었다. 원체 회장이 하는 일이 없으니 올해 대부분.....아니 모든 일은 큐사쿠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기 싫다고 몇번 투정도 부려봤지만,
누가 해서 말아먹는 꼴을 보며 속을 뒤집느니 차라리 내가 죽고말지 싶어서 피눈물을 흘리며 지원했다는 건 일화는 아까부터 몇번이나 안주거리로 씹히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오지 않았지만 큰 행사가 있거나 하면 바쁜 일정에도 얼굴을 비춰주는 선배들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회장의 땡깡덕에 환영회에 참석해준 대학원생인 타치바나 센조라던가, 마찬가지로 대학원생으로 졸업은 했지만 학교에 드나드는 사람도 있고, 아직 졸업은 하지 않았지만 이제 졸업반이라거나 다른 일이 바빠서 최근엔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도 있단다.
또 졸업한지 한참이나 지난 OB들도 잊지않고 때때로 연락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 대표가 바로 키리마루의 '선생님' 인 모양이다. 현재 동아리 방에 있는 커피머신 2대 중 하나가 그 선생님이 기증해준 거라고 한다.
그 외에도 학교 근처에서 가게를 하는 사람도 있는 둥, 이리저리 인맥도 널리 퍼져있는 동아리다.
엄청나게 엘리트같고 이지적이고 똑부러지게 보였던 타치바나 선배도, 어느샌가 평소에도 반쯤 정신이 나가있어 여기서 한 번 더 반이 나갔으니 총 3/4 정신이 나가버린 일행들 사이에 무리없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물론 흐트러지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실게 조금 들어갔는지, 아까보다는 훨씬 많이 풀린 표정으로 바보같은 대화에서 조금 덜 바보같은 대답을 하며 소리내서 웃거나 했다.
란타로는 무심코 옆에 있던 키리마루를 봤다. 제일 신나게 웃으면서 가장 어이없는 소리를 막 내뱉고 있는데 그게 엄청 먹히는지 말 하나 끝날때마다 호응이 뒤따른다.
덴시치는 썩 세지는 않은지 몇 번 잔을 비우지 않은 것 같은데도 새빨개진 얼굴로 평소라면 절대 안 할 것 같은 말들을 하며 납죽납죽 받아마시고 있었다.
아야카시마루는 아직도 사콘 선배에게 붙잡혀 있다. 안색이 아까의 배는 창백해 보인다.
신베는 종업원들 운동 좀 하시라 싶은지 아주 추가 주문을 몇번...아니 몇십번이 아닐까? 나중에 계산할 큐사쿠 선배 낯빛이 파래지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 안되겠다.
여기서 멀쩡한 정신으로 있으려면 같이 미치는 수밖에 없겠어.
란타로는 잔을 쭈욱 들이켰다. 더 주세요!!
우와아-!! 주위에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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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해가지면 몸이 저절로 으슬거린다. 싸- 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우욱."
"어쨰 잘 마신다 했지."
"아냐...아냐 괜찮웁"
"말하지 말고, 온 몸의 세포 에너지를 참는데 써봐."
그 조그마난 세포가 쓰는 에너지까지 뺏어써야할 정도인걸까? 그래도 밖에서 찬바람을 쐬니까 조금은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다. 란타로는 키리마루의 부축해줄까? 하는 친절을 사양하며 입을 막았다.
"어이 신입생. 그 정도에 쓰러지면 어떡하냐?"
"그래, 그래도 여긴 가게니까 다들 좀 자제했는데 말야."
"그게 자제한거라고요?!"
"어이구, 그렇게 푸릇푸릇해서 어떡하니~"
"조만간 시들거야."
"큐사쿠처럼."
"왜 자꾸 절 걸고 넘어지세요."
우하하하 하고 선배들이 웃는 소리도 시끄러운 밤의 대학로에선 그다지 튀지 않았다. 적당히 정리하고 이제 나갑시다, 하는 큐사쿠의 소리에 모두들 겉보기엔 오래전에 날린 것 같았던 정신줄을 챙겨잡고 어기적어기적 가게 밖으로 어떻게든 걸어 나왔다.
화장실 다녀온다고 휑하니 사라진 아야베를 대신해서, 역시나 큐사쿠가 격하게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카운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뭐 저걸 회장이라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험담일거다. 그리고 곧 이어 큐사쿠가 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타치바나 선배를 다급하게 불렀다.
센조는 가게에 들어갔고, 어두운 유리창 너머로 큐사쿠가 뭐라고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는걸 듣더니 센조가 고개를 돌려 밖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일행들을 한번 보는 듯 했다.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센조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갑같기도 한데, 가게 유리창의 색이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얘기가 끝났는지 큐사쿠와 센조가 같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후쿠토미 신베가 누구냐."
센조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았다. 센조는 저요! 하고 순진하게 손을 올리고 근심걱정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좋게 선배 왜 그러세용 하며 웃는 신베를 잠시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다..됐다.
뭔가, 신베를 바라 볼 때 선배의 미간이 움찔거렸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란타로만 스쳐지나가며 뭐지, 분명 오늘 처음보는데 뭔가 도망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하고 센조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작게, 순간적으로 들은거라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했다. 썩 내가 신경쓸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뭐......
"자, 자. 기숙사 사는 사람들은 통금이 있죠-? 얼른 꺼지십쇼. 벌점늘었다고 동아리에 항소해봤자 소용없어요."
과연 동아리의 실권자인 큐사쿠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도 빠릿빠릿하게 사람들을 정리했다. 여기 모여서 밍기적거려봤자 결국 2차나 갈 뿐이라는 이유였다.
댁들같이 닳고 닳은 인간들이라면 모를까, 신입생들이 첫 동아리모임부터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게 할 순 없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주말이라고 놀 생각하지말고, 들어가. 이 인간들 페이스에 맞추면 대학생활 3주차는 위에 구멍난 채로 보내게 될 걸."
경험담 아니에요? 하고 키리마루가 까불자 대번에 발차기가 날아왔다.
허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워하는 후배를 매몰차게 버리는 뒷모습에 다른 신입생들은 모두 생각했다. 맞나봐.
큐사쿠를 포함하여 란타로 등 몇몇은 기숙사 방향 팀으로, 그리고 하숙이며 자취생들 팀으로 나뉘었다. 집에서 통학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미 버스는 끊긴지 오래라 각자 친구들에게 신세질 생각이라고 한다.
귀찮은 일이 끝난 즉시 다시 나타난 아야베는 노골적으로 나는 곧바로 2차를 갈 것이다 하는,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모습이었지만 센조가 뒤통수를 때리자 입을 댓발을 내밀었지만 곧 얌전해졌다.
조금 걷다가 큰길이 나오고, 우선 크게 갈라지는 사람들끼리 인사하고 헤어졌다. 타카마루는 신입들한테 작별의 포옹도 하지 못하게 한다고 징징거리는걸 센조가 아야베와 함께 익숙하게 이끌고 사라졌다. 사몬도 하숙집 방향이 그 쪽이라며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했다.
타카마루는 제정신이 아니라 한 명이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알겠지만, 왜 센조선배는 좀 들떴을 뿐이지 비교적 멀쩡한 칸자키 선배의 손도 꽉 잡고 가는 걸까?
신입생들은 궁금해 했지만, 큐사쿠를 포함한 다른 선배들은 '나중에 알게 된다' 고 말할 뿐이었다. 그 말을 하는데 묘하게 다들 피곤해 보여서 후배들은 얌전히 궁금증을 밀어 넣었다.
란타로는 기숙사지만 키리마루는 자취, 신베는 통학이었다.
그러나 키리마루는 대학로 쪽이 아니라 기숙사 방향으로 조금 더 가는, 조금 먼 곳에 방이 있었고 신베는 학교 쪽으로 돌아가서 교내의 택시 정거장에서 차를 잡아 갈 거라고 했다.
일행이 많다보니 일렬로 죽 늘어서 몇명 씩 그룹이 지어졌는데 어쩌다보니 란타로와 키리마루, 신베 세명이서 함꼐 걸어가게 되었다.
분위기를 타서 꽤 많이 마신 덕인지 몸 안에서는 끊임없이 열이 올랐고, 그 반대로 얼굴을 때리는 밤 바람은 굉장히 차갑고 서늘했다.
그 덕인지 세 사람은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학교 얘기, 아직 2주밖에 되지 않은 대학생활 얘기, 교수가 어쩌고, 동기가 어쩌고, 과제가 어쩌고.
특히 위계질서가 콩가루라는 이 동아리의 전통에 벌써 물들었는지 앞 쪽엔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죽여가며 선배들 험담도 실컷 했다.
란타로는 많이 웃었고, 키리마루도 소리내서 웃었다. 신베는 말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지 몇번이나 단어를 잘 못들어서 두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수준 낮은 개그를 듣게 했다며 싸늘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주로 후자가 많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따지자면 훨씬 많이 웃었다.
매일 왔다갔다 할 떄는 너무 멀다고 투덜거리기만 하던 길이었는데 어째 이번엔 금방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후문 쪽에서 키리마루가 방향을 틀어 먼저 헤어졌다.
까불까불 인사하는 태도가, 분명 이전보다 더 방정맞지만 덜 극적이다. 란타로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키리마루가 깡총깡총 사라졌다.
일행은 다시 학교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다가,
"아참, 맞다." 란타로가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 외치고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자, 신베."
"응?"
란타로는 이제야 슬슬 감기기 시작하는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번호말야. 네가 찍어주면 내가 문자할게.
"찍어주면 분장을 한다고?"
"안 그래도 골이 울리는데 그러지 말아라 너."
신베는 휴대폰을 받아들고는 콕콕콕 번호를 찍었다. 란타로가 받아드니, 번호와 함께 후쿠토미 신베하는 이름 뒤에 커서가 반짝반짝 빛난다.
란타로는 저장버튼을 눌렀다.
"문자에 키리마루 번호도 같이 보내줄게."
"그래도 되나?"
"응, 돼."
란타로는 약간 흔들리는 시야를 잡으려 눈을 몇번 깜빡이면서 주소록을 검색했다. 이 놈은 이름도 참 이상해서 쓰기가 힘들어.....
그런 란타로의 옆에서 신베가 살짝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
"뭐가."
"으음- 아까, 말야. 얘기 들었거든."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건지 되물어보지 않아도, 잠깐 떠올려볼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란타로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역시 키리마루 녀석, 목소리가 너무 카랑카랑하니까 혹시나 싶었는데......
란타로는 신베를 슬쩍 쳐다봤다.
악의나 슬픔도 없고 사기도 없다. 화를 내는 것도 절대 아니다.
그저 조금 난처하다는 얼굴로, 정말로 '괜찮은걸까?' 하는 표정이었다.
아,
란타로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녀석은 정말로..정말로 좋은 집에서 잘 자란 녀석이다.
사랑도 엄청받고 귀여움도 엄청받고 귀한 대접도 무지하게 받아가며 모자라는거 하나 없이 자랐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부티는 엄청나는데, 이상하게 이녀석은 귀티가 안난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포함한 마이너스 감정 비슷한게 정말로 없다.
부티는 부티부티하게 나는데 비해 엘레강스하다거나 하이브리드한 느낌이 제로에 수렴한다. 참 안 어울린다.
생각하는거 하나만큼은 참 서민적이다. 땅콩도 무지하게 잘 까먹고.
으음. 뭐라고 설명을 할까.
란타로는 뭔가 복잡하고도 미묘한 소년...아니 청년의 마음을 설명해야 하는가 싶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금새 찬 바람에 대항하듯 몸 속에서 머리로 치고 올라오는 열기에 멍해저서, 깊게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괜찮아."
열이 올라서 약간 어눌하게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란타로는 전송버튼을 꾹 누르고는 휴대폰과 함꼐 손을 주머니에 쏙 집어 넣었다.
찬 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아까 세명이서 왔을 때 보다 사람이 줄어서 그런지 어째 더 추운 것 같다.
"그 녀석은 싫은 일은 절대 안하거든."
내 생각이지만.
란타로는 속으로만 덧붙였다.
하지만 틀리지 않다. 란타로는 셋이서 같이 걸어오며 그 뺀질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신베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베의 주머니 속에서 문자 수신음이 디롱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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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이기 때문에 하면 남는게 ㅇ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