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초능력AU 썰 백업_01
오래 전 한 익명사이트에 적었었던 황립의 초능력AU 썰입니다. 메모란을 티스토리로 옮긴 걸 계기로 여기에 백업합니다.
혹시나 이 썰을 기억 해주시고, 또 우연히 여기서 발견해주셨다면 다시 한번 정말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만들었던 소장본엔 거의 그냥 그대로 썼었지만 백업을 겸해 오타와 당시 ~했어, 했었어, 같은 어미로 전부 적었던 것을 키세는 ~었다, ~했다. 정도로만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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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으로 초능력 au가 보고 싶다.. 배경은 아주 조금 미래일지도 모르는 현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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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배경은 현대. 초능력자들이 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사회의 일원으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정도의 인구 수다. 다만 특이층이긴 하고, 소수집단에 가까워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타 편견에 가득 찬 과격집단이 아니고서야
‘초능력자야? 흠, 그렇구나.’
-정도의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초능력은 초(超)능력,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현대의 모든 초능력자들은 다들 제어기를 달았다. 제어기의 온오프는 개인재량에 맡기는 편이지만 능력의 종류나 강도에 따라선 온오프의 권리가 특정 관리소에 있기도 했다.
여하튼 다 자르고, 기적의 세대라고 불리는 유명한 초능력자들이 있다. 각자 여러모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인지도로만 따지자면 모델을 겸해 아예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십대스타 키세 료타가 가장 대중 인지도가 높았다. 키세의 초능력은 바로 발광(發光)능력, 빛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키세는 자신의 온몸을 비롯해서 몸 주위에도 빛 무리를 띄워낼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내는 빛이 가장 광도가 높고, 그 다음으로 손위나 몸에서 만들어내는 빛의 구슬-같은 것-, 그리고 몸에 닿은 물체에도 약하게 빛을 내게 만들 수 있었다. 세 번째만은 광도도 낮고 지속시간도 굉장히 짧아서 크게 쳐주는 능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의 둘은 그렇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공격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섬광을 터트리지만 않으면 썩 위험하지도 않다. 그냥 보기에 예쁜 용도의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현대 사회에선 그게 아니었다. 인간의 발전은 불을 얻음으로서, 현대사회의 발전은 어둠을 몰아냄으로써 성립되었다. 아무 자원소비 없이 빛나는 반영구적 빛 에너지인 키세는 엄청난 연구가치가 있었다. 따라서 어릴 적 능력이 발견되자마자 키세는 온갖 연구며 실험을 당해야 했다.
물론 키세는 민간인이고, 지금은 현대인권사회고, 집안 뒷배가 나름 없지는 않았던 덕에 실험이 강제적이었다거나, 비인도적이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주일에 못해도 한 두 번은 실험실에 끌려가서 온갖 검사란 검사는 반복하며 받고, 하라는 대로 하루 종일 구르고, 자기를 연구대상으로 보는 어른들의 눈에 노출되어야만 했다. 결코 바람직한 교육환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린 키세를 실험으로 굴리는 건 대의명분도 참 절절했다. ‘에너지 절약과 지구환경을 위해서’. 지구와 사람을 위해서. 누가 뭐랄 수도 없는 대의명분이었다. 키세는 꼼짝없이 연구대상으로서 컸다.
다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한 덕에 세계에도 드문 동급의 고레벨의 능력자들인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키세의 능력에 기반한 연구도 나름 진전을 보였다. 어느 정도 지구환경과 에너지 절약에 진짜 일조를 한 것이다.
이 성과 덕에 키세는 미디어에 빵 떴고, 이를 계기로 미소년 초능력자로서, 이보다 더 호의적일 수는 없을 정도로 대중에게 엄청나게 호감도를 올린 상태에서 모델로 데뷔할 수 있었다. 키세는 그 상태에서 고등학생이 되었다.
키세는 학교-모델-실험실(연구소)를 오가며 한 달 날짜가 서른 날은 모자라다고 외칠 정도로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어 의무교육기간이 끝나자 모델 기획사는 이때다 싶어 안달이었고, 연구소 쪽에서도 복달이었다. 물론 당사자 입장에서는 학교는 학교대로 수업 진도도 잘 모르겠지, 학교에서 친구라고 제대로 부를 사람은 없지, 좀 친해져 보려 해도 자기 보는 시선은 호감이 있다 뿐이지 연구소 아저씨나 촬영장 스탭이랑 크게 다른 지도 모르겠지......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머리색만큼 개성도 너무 컬러풀하지(그리고 얘들도 얼굴보기 힘들긴 마찬가지다), 쉬는 시간은 없지.........
그 와중에도 나는 스트레스도 제대로 폭발시키지 못하고 화 한번 크게 내보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모델하느라 배운 만든 미소만 저절로 짓고 다니지.
키세는 한숨이 나왔다. 모처럼 겨우 시간을 빼 산책을 나왔는데 거리에 사람은 많지만 자신은 혼자였고, 마음마저 우중충해져 버렸다. 날씨는 맑았지만 하늘 시퍼런 것마저 야속할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참 대단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것이, 키세는 그렇게 자란 것 치고는 정말 비교적......비교적 유순하고 좋은 성격으로 자랐다. 물론 실험과정 자체는 전부 합법이며 비인도적이지도 않았고, 집과 연구소는 통근이었고, 모든 연구 때는 꼬박꼬박 부모님 동의도 받고 인권 감사자가 매번 상담도 하는 둥의 투자한 만큼의 케어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연구소재' '실험체'라는 다른 이름을 달고 자라야 했지만 그래도 다른 친구들에 비해 성격도 썩 난폭하거나-특히 파란 애에 비해- 다루기 어렵지도-특히 빨간 애에 비해- 않았다.
대신 다른 부분이 조금 뒤틀려버렸다. 너무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꾸미게 된 것이다. 어른들이 자신을 정말 소중하고 귀중하다고 진심으로 여기는데, 그 귀중함이 자신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기인한 다는 걸 알아버린 게 문제였다. 언제나 어린아이는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르고, 키세는 특히 영특한 편이었다. 어린 키세는 스스로의 가치를 자신의 내면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능력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델이 되고서는 외양과 언행도 추가되었다. ‘사실 모델 활동도 날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도한 건데.’
물론 키세는 이렇게 딱 잘라 자신을 분석하진 못했지만 어렴풋이 자신의 사고방식은 저런 식으로 흐르고 있고, 쌓아올린 내면은 설탕공예 같다는 걸 알았다. 섬세하지만 굉장히 나약하다는 얘기다. 봐. 그렇게 조르고 졸라서 얻은 자유 시간에, 날씨도 좋은 번화가를 걸으면서 이렇게 땅을 파고 있잖아. 겉으로 보는 자기는 정말로 건강하고 밝고-이중적인 의미로-빛나고 있는데.
키세는 쓰고 온 모자를 다시 푹 눌러썼다가, 하늘을 봤다. 작은 조각구름 두어 개가 떠있는 게 엄청나게 파랬다. 새파란 하늘이 시야 전체에 들어온 그 순간만큼은 삽질을 하던 키세도 하늘이 넓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 키세의 모자가 꾹-하고 눌렸다.
모자가 눌렸다는 건 즉 키세의 머리가 꾹 눌려졌다는 얘기다. 키세는 키가 큰 편이고, 유명인사고, 그렇게 자신의 머리를 뭐로든 누를 수 있는 건 세상에 정말 몇 명 되지 않았다. 키세는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친구들은 오늘 연구실이나 다른 지방이나 학교에 있을 텐데?
하지만 뒤를 봐도, 옆도, 다시 앞을 봐도 아무도 없었다. 키세는 문득 주위 사람 몇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걸 깨달음. 키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앞엔 농구슈즈 바닥이 떡하고.
[...!]
[아, 미안합니다!]
농구슈즈를 신은 사람이 공중에서 훌쩍 뛰어내려왔다, 공중에서. 키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금방 깨달았다. ‘초능력자구나.’
갑자기 머리가 눌리고, 갑자기 사람을 마주한 턱에 얼떨떨해하는 사이에 상대는 허리를 굽혀 키세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발 디딜 곳을 잘못 보는 바람에.]
작은 키(키세가 볼 때)에 비해 목소리는 굉장히 씩씩하고 컸음. 운동부를 연상시키는 그 각 잡힌 사과에 키세도 어영부영 괜찮다고 대답해버렸다.
[혹 다치시거나 하지는?]
[아뇨...아뇨 전혀 문제없습니다.]
눈에 띄는 상황이었고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귀에 잘 울리는 소리라 이러다 주목받겠다 싶어 키세는 손사래까지 치며 괜찮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남자는 안심하면서도 [정말 실례했습니다.]하고, 끝까지 깍듯이 한 번 더 사과하고는 곧 몸을 틀어 훌쩍 뛰어올랐다, 공중으로. 그리고 허공을 휙휙 달려 멀리 사라졌다.
초능력자겠지. 키세는 빠르게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입장 상 보통 비율보다 주위에 초능력자가 많은 키세였지만, 연구소에서 보는 애들 외에 이렇게 눈에 띄게 나는 초능력잡니다 하는 사람을 본 경험은 사실 드물었다. (사실 키세의 학교에도 몇 명 있지만 학교 아이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기 때문에 몰랐다......)
하늘을 날다니, 정말 초능력의 정석이었다. 그래선지 키세는 어째 계속 그 남자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얘기하는 내내 고개를 숙였을 때 빼고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과 얘기할 때는 눈을 마주치는 타입 같았다. 그래서 키세는 짧았지만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눈이 정말 맑은, 새파란 색인 걸. 바다색을 닮기도 했고 혹은 지금같이 짙푸른 초여름의 하늘색 같기도 했다. 그래설까, 그래서 저렇게 멋지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구나. 거침없이 쭉쭉 멀어지는 모습이 하늘 아래 정말 지독히도 자유롭게 보였다. 문득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키세는 잠시 멍하게 있었던 대가로 결국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짧은 자유시간을 사인과 탈출에 소비해야 했다.. 너덜너덜해져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남자에 대한 건 머릿속에서 싹 잊어버렸다.
***
시점을 돌려서, 카사마츠 선배, 카사마츠 유키오.
카사마츠는 초능력자였다. 능력은 바로 하늘을 달리는 것.
나는 게 아니라 달렸다. 카사마츠는 달릴 때 허공을 밟을 수 있었다.
카사마츠에게 있어 이 초능력은 유쾌한 친구였다. 그래서 운동도, 특히 달리기를 열심히 해올 정도였다. 초능력이 발현한 후엔 어느 정도 연구에 참가했지만, 이 능력은 제약이 있는 데다 딱히 실용화 계획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정기적으로 의무검진을 받는 정도였다.
그래서 카사마츠는 초능력자라고 나름 사춘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특유의 성격이나 성정으로 친구도 많았고 -대회에 못 나가기 해도-운동부에- 들거나 밴드에 취미를 붙이는 등 평범하게 자랐다. 일반인 친구도 많았다, 아니 원래 인구 중 초능력자의 비율은 적으니까 보통 당연히 친구는 일반인이 많을 수밖에 없긴 해도.. 그들과 가끔씩은 언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해주고 때로는 부럽다는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도 하면서 꽉 채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카사마츠에게는, 카사마츠만이, 일반인도 모르며 동능력의 초능력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신만의 감각이 하나 있었다. 하늘을 가르고 뛰쳐나가는 감각. 바람을 가르는 순간, 눈앞에 오직 하늘밖에 없는 그 순간.
카사마츠는 태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달렸던 그때부터,, 줄곧 생각하던 게 하나 있었다. 만약 언젠가 내게도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면 꼭 이 순간을 함께 느끼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카사마츠는 자신의 능력을 좋아했지만, 자주 쓰는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맞춰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초능력자들은 명백히 소수집단이었기 때문에 과도한 초능력 남발은 썩 좋게 보지 않는 분위기가 조금 있었다. 가진 바 능력이니 쓸 수도 있고, 써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사람들 앞에서 너무 과시하면 눈치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카사마츠가 기대하던 밴드의 신작 앨범이 나오는 날이었다. 초회한정, 그 마성의 단어가 사람 마음을 흔들었다. 카사마츠는 서둘러 나왔지만, 두 가게에서 허탕을 쳤다. 하지만 친구한테서 번화가에게 있는 모 샵에 있다더라는 정보를 듣자마자 재빨리 방향을 틀어 번화가로 나왔다. 하지만 초여름, 날씨 좋은 휴일의 번화가는 이 길도 저 길도 사람들로 가득해 좀처럼 빠르게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미 몇 번 헛걸음을 한 카사마츠는 조금 초조해졌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 씩이나 됐지만 그래도 역시 학생은 학생이었다. [이번만!] 하고, 카사마츠는 다리를 크게 들어 공중으로 뛰었다.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상의 얘기였다. 2미터만 위로 올라가면 레일조차 없는 뻥 뚫린 하이웨이 아우토반. 카사마츠는 거리낌 없이 크게 뛰었다. 초여름의 하늘이 맑았다.
슬슬 목표했던 가게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카사마츠는 뛰어내릴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고 쿠션을 한번 둘까, 하고 약간 사람 머리 높이 정도에 발을 디디려고 하는데...... 그때...... 웬 키 큰 남자가 불쑥 자신이 발을 디딜 곳에 머리를 디밀었다. 카사마츠 기겁해서 힘껏 디딜 곳을 바꿨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그 사람의 모자보다 약간 위쪽을 누르는 걸로 끝났다. 그래도 머리까지 눌렸는지 남자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카사마츠는 한 번 더 공중에서 발을 디딘 다음 털썩, 땅으로 내려와 급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카사마츠는 숙였던 고개를 들자마자 조금 놀랐다. 남자는 모자랑 색이 있는 색이 들어간 큰 안경을 써서 얼굴 라인만 보이는 데에도 미남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잘생겼는데, 키도 크고. 무슨 모델인가? 딱 봐도 연예인이 외출한 듯 한 패션이고...... 그런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러다가 우선은 사과가 먼저였다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카사마츠의 정중한 사과에 키 큰 남자는 손사래까지 치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초능력 사고는 처벌이 더 엄중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 탓에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카사마츠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데 문득 듣기 좋은 목소리가 다시 귀를 울렸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운동부원 같은 말투가 어쩐지 묘하게 귀에 익었다. 익숙하다기 보다는, 어디서 분명 한 번쯤 들어본 느낌으로...... 하지만 카사마츠는 상대가 확언하는 괜찮다는 말에, 실제로도 괜찮은 것 같아 금방 초회한정으로 사고를 돌렸다. 이러다가 또 놓칠지도 몰라. 실례했다고 한 번 더 말한 뒤,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냥 가게 앞까지 이대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째 그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도 같았지만, 금방 멀어졌다.
카사마츠는 초회한정 샀다고 친구들한테 인증 샷을 돌린 뒤 집으로 돌아갔다. 일단 손에 들어왔으니 천천히 감상할 예정이었다. 내일 학교에 가져가서 친구들한테 자랑도 좀 하고- 그때 카사마츠는 깨달았다. 학교.
학교에서 본 적이 있는 그 키, 들은 적이 있는 운동부 같은 말투. 그때는 당황해서 미처 몰랐지만 모자 뒤로 나온 머리카락은 밝은 금색이었던 것 같다.
[그 녀석, 1학년의 그 키세였나 혹시......?]
카사마츠 유키오, 카이조 고교 3학년. 키세 료타, 같은 학교 1학년. 들어온다는 얘기가 퍼졌던 올해 초부터 온 학교 여자애들이 떠들어 대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떠들고 있고.
카사마츠는 물론 키세를 알고 있었다. 유명하니까. 기적의 세대라고 불리는 세계구급 초능력 세대의 일원, 게다가 십 대 모델 중에선 정상급을 달리는 유명인. 같은 학교긴 하지만 얼굴을 본 건 거의 텔레비전에서 정도였다. 연예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지금도 뉴스든 다큐멘터리든 에너지 문제를 다룰 때는 키세의 이름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언급되곤 했다.
학교에서는 3학년과 1학년의 행동반경이 달랐다. 만약에 둘 다 운동부에라도 들었다면 서로 얼굴이라도 좀 더 알았을 수도 있겠지만, 초능력자는 대부분의 운동경기에 참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련 부활동은 들어갈 수도 없었다. 가끔 매점이나 식당 같은 데서 볼 때에도 거의 여자애들에 둘러싸여 금발인 머리만 두 개는 톡 튀어나온 걸 멀리서 봤을 뿐이었다.
헤- 그런 녀석을 바깥에서 봤네. 하고 새삼 신기해하다가 아차 싶었다. 그 유명인의 머리를, 정확히 밟은 건 아니지만, 여튼 머리를 꾹 눌러줬다니. 앙심을 품거나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문득 들긴 했지만 바로 한 사과에 당황해하면서도 크게 따지지 않고 답해줬던 걸 보니 그렇게 성격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혹은 뭐 좀 꿍했더라도...... 키세가 자신을 계속 기억할 거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런 유명인이 지나가는 사람 혹 좀 세게 부딪혔더라도,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을 어필하려는 사람이 주위에 얼마나 많을까. 자신 정도는 그냥 지나가는 통행인 11 정도로서 자고 일어나면 기억도 못 할 거라고 결론지었다. [흠, 그렇겠지.]
그렇게 납득한 카사마츠는 시원스러운 성격을 발휘해 자신도 쿨하게 오늘 일을 머리 뒤로 넘겨버렸다. 그보단 신작 앨범이 더 중요했다. 카사마츠는 이내 털어버리고 즐겁게 앨범의 포장지를 뜯었다.
다만 카사마츠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물론 키세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고, 자신을 어필하려고 별 짓을 다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키세는 그걸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키세의 주변에 공중을 뛰어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다음 날, 카사마츠는 등교해서 예정대로 친구들에게 앨범을 자랑했다. 키세는 모델일 때문에 결석계를 제출하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초여름 날씨는 어제에 이어 계속 맑았다. 대부분의 또래들이 학교의 책상에 앉아서 한숨을 쉬며 바라볼 하늘을, 키세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제 쉬는 날은 잘 쉬었냐는 매니저의 말에 한 번 울컥한 것 외에는-중간에 사람들한테 잡혔어요, 선글라스도 꼈는데!- 늘 있던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하늘, 어제, 쉬는 날. 세 가지 키워드에 키세는 어젯밤에 잊어버렸던 것을 반짝 떠올렸다. 내 머리통을 밟은 파란색 눈을 한 그 사람! 그리고 한번 떠올렸더니 어째 계속 머릿속에 머물렀다. 마치 반복 재생되는 것 마냥 그 남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것, 큰 소리로 사과하던 것, 곧바로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밟고 뛰어오른 것, 하늘 속으로 멀어지던 것- 이런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플레이됐다.. 왜 일까?
오늘 촬영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주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불경마냥 반대쪽 귀로 빼내면서 키세는 멍하니 생각했다. 조금이 지나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간만이었다, 자신을 '키세 료타'로' 보지 않았던 사람과 얘기하는 게. 그야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었긴 해도.
그리고 무엇보다 키세에겐 공중을 달리는 그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 시원해 보였다. 그 사람은 원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거였다. 누구든 똑바로 보면서 얘기할 거고, 사과를 해도 큰 소리로 똑바로 할 거고. 감사인사도 시원하게 할 거다, 진심을 담아서. 단 세마디도 나누지 못한 상대지만 키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는 정 반대인 사람일 거라고 말이다.
키세는 그 남자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 다음에 똑바로 그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무래도, 우연히 부딪힌 타인이 아니라 희귀 초능력자거나 유명모델인 키세 료타로서 봐야 한다. 모처럼 카타르시스를 약간 느낄 수 있는 인물상을 잘 상상했는데 다시 만나면 그게 깨질지도 모른다는 건 싫었다. 제멋대로인 생각이지만 뭐 어때, 잠깐 부딪힌 남남인걸......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키세는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너 똑바로 안 들어?]
결국 키세는 매니저한테 졸음쫓는 사탕으로 한대 맞고서야 정신을 차렸고 스튜디오에 갈 때까지 정신빼지 말라고 잔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키세의 바람과는 반대인지, 혹은 그대론지 두 사람은 곧바로 만나게 된다.
그야 이 둘은 같은 학교니까, 날아간 개연성을 빼고서라도 보려고만 한다면 꽤 자주 볼 수는 있었다. 아까 말했듯이 여자애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머리통이 하나 쑥 나와 있는 집단을 찾으면 그게 키세 머리통이었으니, 카사마츠가 키세를 보는 건 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보는 것이지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둘은 키세 머리 밟힌 날 이후로는 이 날 처음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 채로.
키세는 촬영이 길어져서 이틀을 그대로 결석하고, 그 다음날에야 학교에 나타났다. 당연히 가자마자 금방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만에 하나 키세가 부활동이라도 했으면 이럴 때 가드해줄 동료가 있을지도 모르고, 체육계에서 구르다 보면 사람대하는 방법도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키세는 피곤했지만 저 이제 누구 좀 만나러 간다든가 부활동 간다든가 하는 걸로 급우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네네 그래요 네네 하고 어찌어찌 대꾸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떤 여학생 한 명이, 키세가 없을 때 프린트 같은 걸 서랍에 넣어두었다고 말을 꺼냈다. 키세는 무슨 과목인가요, 수학이면 싫은데~ 하고 대답하며 서랍을 뒤져 종이 뭉칠르 꺼냈다. 프린트는 꽤 많았다. 으엑하고 다 같이 웃으면서 통째로 책상에 올려두는데.
프린트 뭉치 맨 위에는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아직도 있나, 쓰는 사람도 놀라면서 썼을 것 같은 귀여운 무늬의 편지봉투가 하나 곱게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이건...... 마음을 한 자 한 자 종이에 손으로 적어서 보내는, 바로 그 편지처럼 보였다. 키세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키세의 자리는 창가, 지금은 초여름이라 교실은 아직 냉방을 하지 않고 창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맞거나 빠져나가는 자리였다. 어떤 신의 장난인지, 개연성의 신인지 바람의 신인지, 창가 자리의 종이뭉치 맨 위 놓여있던 편지는, 키세가 손으로 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 불어온 바람에 속절없이 휭 뜨더니 그대로 창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놓란 키세가 잽싸게 잡아채려 했지만 얇은 종이봉투는 무심하게 손을 빠져나갔다.
[세상에, 방금 그거 편진가?]
[날아간 거야? 어떡해.]
[키세 군, 그거 키세 군 거?]
보고 있던 아이들도 난리가 났어. 떨어진 거 어떡해, 주우러 가자. 같이 가줄게. 키세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제 건 아닌데......아니라서 더 곤란하네요. 제 거면 제가 무슨 편지인지 알기라도 하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서 나풀나풀 떨어지는 중인 편지를 눈으로 좇으며 키세가 쓰게 웃었다. 무슨 편지인지 내용이야......뭐 대충 짐작이 가긴 했지만. 보고 있던 아이들도 다 짐작했다. 그 소란에 같은 교실의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고개를 디밀어서 누군가의 순정이 팔랑팔랑, 여름 바람에 날려 학교 교단의 나무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걸 다 같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편지가 떨어진 나무는 굉장히 높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종이가 나무의 가장 꼭대기 가지에 탁 내려앉는 바람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도 어중간해 보였다. 고민하는 사이 수업종이 치는 바람에 다들 제자리고 돌아갔고, 키세는 수업 내내 혹시 저게 바람에 날려서 다른 곳으로 떨어지진 않았는지 신경을 써야 했다. 아무도 못 봤는데 저 혼자 날아갔으면 자기도 모른 척하면 되지만 반 친구들이 죄다 보는 데 저렇게 되어버렸으니 어떻게 되찾으려는 노력을 했다는 거라도 보여야 했다. 아직 학기가 시작한 지 두 달도 안됐고, 키세는 이미지로 먹고사는 모델이었으니까 요즘 세상에 편지까지 보낸 순정파 문학소녀(예상)의 마음을 내버리는 꼴을 보이는 건 좋지 않았다.
귀찮게 됐다. 어떻게 해야 열심히 되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어필을 할 수 있을까요. 키세는 희끗하게 보이는 나무 꼭대기를 힐끗대며 저게 한 번 더 바람에 날려 밑으로 툭 떨어지면 훨씬 편하겠다, 주워오기만 하면 될 거고....,.. 하고 생각했다. ........아, 그래. 지난 번의 그 사람 같은 능력이라면 쉽게 가져와줄 수 있을 텐데.
매정하게도 바람은 그 후로 한 번도 불지 않아 교실 안은 약간 더웠다..
고개를 내내 창문 쪽으로 돌려대느라 목이 뻐근할 정도였던 수업시간이 끝나고, 키세는 자기 지금 저거 찾으러 간다는 어필을 하며 나무가 있는 내려갔다. 같이 가주겠다는 급우들의 말엔 뭐 그렇게까지야- 하고 답했지만 따라온다는 걸 딱히 말리지도 않았다. 문제의 나무 아래에 도착한 키세는 기둥을 손으로 탁탁 쳐보고, 키가 큰 키세가 손에 닿는 가장 높은 가지를 흔들어보고, 다른 친구들이 나서 줘서 몇 번 슬쩍 두어 번 발로 차보기도 했다. 하지만 저 꼭대기에 있는 러브레터는 주인의 마음을 전할 의지가 요만큼도 없는지 키세와 급우들의 노력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키세는 정말 곤란하고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슬쩍 운을 띄웠다.
[아- 이런...... 쉽지 않네요.]
여학생의 순정을 차마 먼저 '안 되겠다. 포기합시다! 포기하고 밥먹읍시다' 하고 나서기에는 지켜보는 눈도 많고 자신도 조금 그랬다. 아니, 사실 이 쯤 되면 저 편지의 주인은 차라리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을까? 요즘 세상에 편지를 적어 책상서랍에 몰래 넣어둔다는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일 텐데, 자신의 편지가 어디 전시물마냥 이렇게 주목받고 있는 걸 달가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사다리를 빌려도 저기까지 닿지는 않겠네요.]
키세가 옆에서 걱정스런 얼굴로 같이 나무 꼭대기의 편지를 쳐다보는 반 친구들에게 말했다. 해석하자면 ‘슬슬 포기하고 밥먹어여 언젠가 내려오겠지-’라는 뜻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떡해, 너무 안됐다...... 당번을 정해서 계속 지켜볼까? 바람이 또 불면 떨어질지도 몰라......라고, 하나같이 안타까워하며 웅성거렸다. 키세는 배가 고팠다.
그때 같이 따라온 남학생 한 명이 문득 말했음.
[아, 그러고 보니 3학년의 그 선배한테 부탁하면 어때?]
[누구?]
다른 아이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음. 키세도 귀가 반짝 뜨였다.
[우리 형도 여기 3학년인데, 같은 학년에 공중을 날 수 있는 초능력자 친구가 한 명 있다고 하더라. 그 선배한테 부탁하면?]
[누군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도와달라면 실례 아닐까?]
[형 말로는 성격 좋대. 나도 한 번 인사한 적 있는데 나쁜 인상은 절대 아니었어.]
남학생은 꽤 자신있게 말했다.
사실 초능력자에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갑자기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는 건 실례가 맞았다. 학생들의 시점으로 보자면 마치 말 한 번도 안 나눠본 급우가 ‘너 만화 잘 그린다며? 나 좀 그려줄래?’ 하고 갑자기 요청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 이 또래집단은 편지를 되찾는데 푹 빠져있었고 유명한 키세를 돕는 일이니까, 도와주실 거야, 성격도 좋다니까 더더욱!! 하고 약간 들떠있었다.
키세가 말릴 틈도 없이 먼저 말을 꺼낸 남학생이 자기가 다녀온다며 3학년 교실 쪽으로 뛰어갔다. 여학생들은 잘 됐다며 서로 소란스러워졌다. 키세는 어쩐지 멍해졌다. 머리회전이 빨리 안돼서.......아니, 반대였다. 너무 핑핑 돌아가서 사실은 조금 전, 남학생을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초능력자는 수가 많지 않고, 능력을 종류별로 나누면 동일 능력자는 또 매우 적었다. 하늘을 난다는 사람이 같은 가까운 동네에 두 사람이나 있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분명 그 날의 그 남자, 3학년라고 하기엔 조금 어려 보였던 감이 있지만 분명 키세와 비슷한 또래였던 건 확실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멋대로인 생각이긴 했지만, 만나고 싶고 또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지 겨우 이틀 째였다. 급우는 이미 선배라는 사람을 데리러 떠나버렸고 이제 자신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 사람일까? 그런 우연이 또 일어날까. 우연히 만나서 머릿속에 남은 사람이 신기하게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니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얘기 같았다......어라 로맨스? 왜 하고 많은 소설 중에 로맨스지?
키세는 잘됐다고 해주는 여학생들에게 어영부영 대답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만약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라면 이번에 한 번 더 얼굴을 볼 수 있는 건가. 그 목소리가 이번엔 자신을 향해 뭐라고 얘기할까?
이번엔 모자랑 선글라스를 낀 보행인A 가 아니라 키세 료타를 보는 것이다. 표정이 변할까? 그 파란색 눈은 어떻게 나를 담을까. 역시나 변할까, 놀랄까, 다른 사람들처럼 호기심과 동경과 선망, 질투, 호감 이런 것들을 담아서 빛날까 바래질까.
아니, 아니, 그전에 이 사람은 저 나무 꼭대기에 오르려는 와주는 거지. 그럼....... 그러면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건가. 파란 하늘을 향해 뛰어들 듯 허공을 박차고 나는 그 모습을.
키세의 심장이 작게 콩콩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