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돌아온 남학생은 옆에 다른 한 사람을 대동하고 있었다. 카사마츠였다.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들은 3학년 남자 선배를 앞에 두고 다시 기세를 올렸다.

 

[진짜 와주셨어!]

[좋은 분인가 봐, 다행이야 키세 군!]!!!]

 

  한편 키세는 멀리서 걸어오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고가 딱 정지해버렸다.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맞아. 멀리서 봐도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네. 로맨스 소설도 이렇게 앞뒤가 딱딱 맞지 않겠어......아니, 왜 하필 자꾸 로맨스지? 아니 어쨌든 그보다......진짜였다. 실물이었다. 그 때도 물론 실물이었지만, 여하튼간에.

 

  번화가에서 머리통을 밟힌 후 3, 겨우 사흘 만에 키세는 허공을 달리던 그 남자를 마음 속에서 반쯤은 우상화를 시켜놓고 있었다. 수백 번 리플레이하고 수천 번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건 그 날의 짧은 대면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도 있었고, 촬영하던 이틀간 쉬는 시간마다 딱히 할 만한 다른 생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조금은 동경하던 그런 타입이 내 옆에 있다면?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저렇게 나온다면 나는?

그건 마치 최애캐를 머릿속에서 굴리는 덕의 마음과도 비슷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이 도왔는지 키세의 머릿속 최애는 바로 저 앞에서,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을 향해 척척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애캐는 키세를 얼핏 보자마자 눈에 띄게 딱 굳어버렸다.

 

 남학생은 형의 친구인 카사마츠를 알고 있어서 쉽게 그를 찾았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남학생의 작은 오산은 카사마츠가 키세의 이름이 나오기도 전, -이제야 사실은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서-살짝 망설이며 꺼낸 '편지가 나무 위에 떨어졌는데' 까지만 듣고도 도와줄 테니 안내하라고 일어난 것이었다.

 

 

 

  고학년을 앞에 두고 눈에 띄게 안심하는 친구 동생을 나름 귀엽게 바라보며 척척 걸어온 카사마츠는, 그래서 거기에 키세가 있는 줄은 몰랐다. 카사마츠가 굳은 건 키세 때문이 아니었다. 키세보다도 먼저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의 무리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나이 카사마츠 선배는 너무 사나이라 여학생 대하는 것이 좀 어려웠다. 친구들이 놀릴 정도로 정말 어색해했다. 기계처럼 굳은 걸음으로라도 가까이 다가가니 곧 키세도 제대로 눈에 들어왔지만 일단 지금 카사마츠에겐 저 희멀건 모델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척수반사마냥 여자 머리카락 끄트머리만 봐도 저절로 온몸이 굳으니, 이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는 보는 사람을 굳게 만드는 초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본인 생각에도-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선배는 선배였다. 자신을 데려온 애를 포함해서 남학생도 몇은 있었고, 지금은 키세도 그 키세가 아니라 마음에 안정을 주는 XY염색체 남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카사마츠는 무리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눈에 띄는 남학생-즉 키세에게 말했음..

 

[내려달라는 게 혹시 네 편지냐?]

[, !]

 

  키세는 카사마츠가 자신 쪽을 바라보자마자 딱 경직되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무진장.......서운함을 느꼈다. 마치 최애캐가 이번 연재분에서 내 해석과 다른 행동을 한 느낌? 잘못은 최애캐에게 있지 않지만 배신감을 느끼는 그런 느낌.

 

  자기가 근래 이틀 머릿속에서 돌려댄 시뮬레이션 중 상당수 아니 대다수의 그 사람은자신을 알아보고도 굳거나 당황해하지 않았었다. 침착하게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고, 내 커리어나 내 배경 같은 걸 보고도 쿨하게 그렇군,’ 하고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상상했다. 자신의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기를 바랐었기 때문이다. 마치......로맨틱 코미디처럼. 평범한 여주인공이 내 뺨을 탁 치면 나는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말하는 거지요. 아니 왜 또 하고많은 코미디 중에 로맨틱이람?...... 이런 망상을 뭉글뭉글, 그동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현실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 남자는 나를 보고 놀라고, 역시나 딱딱 경직된 자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3학년, 나보다 두 살은 선배면서. 키세는 예상보다도 자신이 훨씬 풀이 죽는 걸 깨달았다...... -아니,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키세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사람을 멋대로 상상하고 망상해놓고는 또 멋대로 실망하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키세는 서운한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자신이 며칠간 생각했던 파란 눈의 그 남자도 꾹꾹 눌러 버리고 걸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활짝 웃었다.

 

[일부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든 키세는 사고를 딱 멈췄다. 어느새 자기 바로 앞까지 온 카사마츠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짧았던 실제보다 상상 속에서 더 많이 보았던 그 눈동자가, 진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키세는 꼭 눈빛을 쏜다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 눈이 자신을, 눈앞에 있는 자기를 딱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다시 닫는 순간 그 생각마저 멈춰버렸다.

 

[내려달라는 게 네 편지냐?]

[, !]

 

  카사마츠의 질문에 허둥지둥 대답했다. 기억 속, 짧게만 들었던 그 목소리랑 비슷하기도 하고 기억보다 귀에 더 날카롭게 울리는 것도 같았다. 키세의 가슴은 아까보다도 훨씬 뛰고 있었다. 우와, 뭐라고 해야 하나 딱 '선배' 란 느낌이네요. 시비 거는 것도 아니고 고압적인 것도 아닌데, 저렇게 짧게 묻는 게 어쩐지 되게......왠지 두근두근....... 이건 기억대로에요, 이 사람은 얘기할 때 사람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하네요......우와......우와아......

 

  키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전개시키고 있는지 카사마츠는 요만큼도 모른 채 고개를 틀어 문제의 편지의 위치를 확인했다.

 

[저 꼭대기에 있는 분홍색 저거?]

[네,네넵]

 

  , 창피하게 왜 자꾸 횡설수설하지? 키세는 왜 이렇게 자신을 추스리기 힘든지 당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남 앞에서 멀쩡한 척 하기는 주특기였는데.

 

  카사마츠는 흠, 하고 한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발끝으로 지면을 몇 번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데려온 후배를 향해 말했다.

 

[나는 하늘을 그냥 나는 게 아니라 공중을 뛰어야 하니까 도움닫기를 해야 해, 다들 조금 뒤로 물러나라.]

 

  뒤에 있던 남학생을 향했지만 나무 근처에 옹기종기 있던 여자애들이 먼저 알아듣고 호다닥 걸음을 떼어주었다. 카사마츠가 뭔가를 가늠하듯 나무의 위아래에 시선을 두며 뒤로 몇 걸음을 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던 키세는 엉겹결에 툭 말했다.

 

[, 저 선배. 번거롭게 일부러 안 그러셔도 됩니다. 별 것도 아니고 또 나중에 바람 불면 떨어질지도......]

 

  키세는 문장을 끝까지 주워 삼키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다시 마주친 파란 눈이 형형하게 자신을 쏘아보았다. [임마!] 그 큰 호통에 키세도, 듣던 후배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카사마츠는 딱 굳은 키세를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 보더니 손을 들어 키세의 가슴을 가볍게 툭, 쳤다. 마치 아빠나 형의 가벼운 잔소리를 주먹으로 대신한다면 딱 이런 느낌일 거라고,, 키세는 와중에도 문득 떠올렸다. 카사마츠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키세가 입을 딱 다물었다. 카사마츠는 뒤로 몇 걸음, 몇 걸음 더 물러났다. 발끝으로 땅을 두 번 툭툭 치고, 무릎을 가볍게 굽힌다 싶더니, 뛰었다.

 

  마치 공중에 작은 트램펄린이 계단같이 놓여저 있는 것처럼 허공을 누르고, 몇 번이나 튀어올랐다. 세 걸음 만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카사마츠는 나무 끝을 통과하는 순간 손을 뻗어 편지를 낚아챘다. 내려올 때는 조금 펄ᄍᅠᆨ 뛰어내린다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땅에 닿을 때는 탁, 하고 무게있는 소리가 났다.

 

  키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카사마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에서 별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사실 키세는 비슷한 게 튀어나오 게 할 수 있긴 하지만. 주위의 급우들이 카사마츠가 편지를 잡는 순간 와- 하고 박수를 치는 것도 키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카사마츠가 자신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왔다. 손을 내밀었다. 키세는 시선을 내렸어.

 

 선배의 손에 들린 건 분홍색의 편지. 마음이 담긴 러브레터.

 

[.]

[.......감사합니다.]

 

  키세는 천천히 편지를 받아 들었다.. 머리는 멍했지만 다행히 고맙다는 인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카사마츠는 얘가 왜 이렇게 멍하나 하는 표정으로 잠깐 쳐다봤지만, 곧 친구 동생 남학생에게도 감사인사를 받고서는 여운하나 없이 깔끔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종칠텐데 얼른 점심 먹어라, 하는 선배가 하는 의례적인 인사가 끝이었다. 여학생들은 카사마츠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너무 멋있었다며, 초능력이란 거 참 편리하고 좋다- 같은 감탄을 몇 마디 했다. 키세에게도 연신 잘됐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키세도 따라 대답했어.

 

[, 정말 잘됐죠.]

 

 키세는 보는 사람들이 저절로 열이 오를 정도로 기쁘고, 환한 얼굴이었고, 정말 설레는 표정이었다. 히어로 쇼에서 텔레비전 속 히어로와 처음 악수를 하는 꼬마아이가 아마 이렇게 웃을 것이다. 키세는 편지가 구겨질까 꽉 쥐지도 못했다. 아까완 달리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정말 기뻐요.]

 

 키세는 카사마츠가 사라진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눈, 나를 똑바로 쳐다보던 눈동자, 선배. 호통소리,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간 게 그 사람의 주먹인지 아니면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탁 하고 지면을 박차는 소리와, 그리고, 그리고.......

 

[어떡하죠.]

 

 내 기억보다 상상보다 훨씬, 훨씬 더 멋진 것 같아요.

 

 키세의 눈에 빛이 반짝반짝 어렸다. 그건 키세가 이제까지 냈던 어떤 빛보다도 가장 나어리고 밝은 빛이었다.

 

 

 

  카사마츠는 교실에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푹 엎어졌다. - 하고, 앓는 소리 비슷하게 신음소리가 절로 났다. 카사마츠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아는 동생 도와주러 갔다 온 거 아니야? 허공에서 바지라도 벗겨졌냐. 시끄러워, 모리야마. 카사마츠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모리야마는 웃었다.

 

  카사마츠는 삼일은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키세가 자기 얼굴은 기억 못 해도 허공을 턱턱 딛고 나는 사람은 기억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초능력자가 아주 희귀한 건 아니지만 길가에 데굴데굴 굴러다닐 정도로 흔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쩐지 그 키세도 자신을 보는 순간 표정이 미묘해졌던 것 같다. 아까는 중간에 후배 말을 끊고 나가느라 도와달라고 한 장본인이 키세였다는 걸 도착해서야 알았다.

 

  거기까지 가서도 먼저 여학생 떼거리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바람에 키세 료타는 머릿속에서 깡그리 날아가버렸다. 정확히는 머리에 들어왔긴 한데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게 좀 더 맞는 말이었다. 거기에 그 녀석이 뭔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영 맹해보이는 표정에 예상보다 더 어리버리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친한 후배들에게 하던대로 큰 소리도 한마디 하고 와버린 것이다.

 

[으아-]

 

 추궁해서 자초지종을 대충 들은 친구들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이야... 그 귀하신 머리통을 밟았어? 너 우리학교 여자애들 전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냐.]

[......]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집단은 지금도 적이긴 했다.

 

[여자애들 공적되면 나랑 넌 그 시간부로 절교하는 거야. 완전히 남남. 오케이?]

[모리야마......]

 

 모리야마는 얼굴을 찡그린 채 머리를 팍팍 문지르는 카사마츠를 보면서 낄낄 웃었다.

 

 내 이것들을 친구라고 잘도 두고 있었다고, 카사마츠가 투덜거렸다.

 

[-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되돌리면 도와주러 안 갈 거냐?]

[그건 아니지.]

 

 코보리가 묻자마자 카사마츠는 바로 대답했어. 코보리도 웃었다. 그렇지?.

 

 두 사람은 키세도 끝까지 별 반응 없었다면서, 사과한 걸로 다 잘 끝난 일이야, 너답지 않게 신경을 쓰고 그러냐- 하고 몇 마디, 절반 이상은 놀리면서 위로해주었다. 카사마츠도 거기엔 대충 동의했다. , 오늘 본 어리바리한 표정을 보아하니 키세 료타는 확실히 성격 독하거나 나쁘다거나 한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자기가 설핏 들었던 것보다 훨씬 표정도 다채로웠다, 딱 고1, 아니면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온 편지를 안면도 없는 선배에게까지 부탁해서 찾아오려 했다는 데서 카사마츠는 걱정을 접었다. , 결국 안면이 없지는 않았던 게 들통나고 중간에 헛소리를 내뱉기에 저도 한마디 해줬긴 하지만. 아무래도 공중을 걷다가 사고가 난 것이, 누구 머리통을 정통을 밟은 일은 자신에게도 처음이라 영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연예인이란 좀 더 까탈스러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카사마츠는 그걸로 약간 평가가 바뀐 키세를 쿨하게 머리구석으로 치웠다. 이걸로 짧은 인연은 끝일 것이다. '혹 학교에서 신체검사 할 때 인사 한 번은 할지도?‘ 일반 신체검사 때도 초능력자는 다른 검사도 추가로 받으니까. 카사마츠는 태평해진 마음으로 남은 주스를 쭉 마셨다.

 

 지금 키세가, 생전 처음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타인에 대해 물어보느라 끙끙대면서도 카사마츠 선배의 이름 자와 반이며 성격이며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반 친구들로부터 쪽쪽 빨아내고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

 

 드물게 오늘 연구소도 모델 쪽도 스케줄이 없었던 키세는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키세는 현관을 따자마자 물 흐르듯 신발을 벗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까지 질주해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그렇게 잠깐 죽은 듯 있다가 갑자기 몸부림을 막 쳤다. 아 어떡해, 어떡해! 그러다 지쳐서 숨을 가볍게 몰아쉬다 이번엔 또 번개같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내팽개쳤던 가방을 길쭉한 팔로 끌어당겨 열었다. 꺼낸 건 오늘의 그 편지였다. 봉투는 이미 열려있었다. 오는 길에 열어봤다.

 

  사실 팬들이 손수 쓴 편지 같은 건 사무소를 통해서 꽤 받아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요즘 시대에 학교에서 받은 러브레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이 편지가 가진 다른 이유 때문일까. 키세는 편지가 빨리 보고 싶어서, 하교하다 말고 편지를 뜯었다. 의외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당연했다고 해야 할까. 편지는 레터는 레터였지만 러브레터가 아니라 팬레터였다.

 

-키세 료타 군에게. 팬입니다.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 들어와 준 것이 정말 꿈만 같아요.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내길 바랍니다. 익명희망-

 

  편지봉투와 세트인 분홍색 편지지에, 아마도 여자아이의 필체같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짧은 문장이 단정하게 적혀있었다. 글이랑은 살짝 담을 쌓은 키세가 봐도 순수하고 수줍은 편지였다. 그리고 키세는 생각했다.

보내준 익명희망 양에게는 조금 실례일까요. 나는 이 편지를 그 사람 손에서 전해 받던 그 순간이 너무나 기억에 남아요. 초여름이고, 그 사람은 하늘을 날아서 이 편지를 내게 전해줬어요. 그 순간마저도 파란 두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게 생각이 나요. 정말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니 왜 자꾸 많은 영화 놔두고 로맨스지?!

여하튼 익명희망 양! 정말! 정말 고마워요!! 내가 원래 팬에게는 이렇게 격하게 감사인사 안하는 사람인데 오늘따라 눈물 날 정도로 감사하네요...!

 

  이 편지 덕분에, 그리고 이 편지가 바람에 날아간 덕분에 기적처럼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한 번의 우연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고 내 머릿속에서 망상으로만 허망하게 존재할 뻔 했는데, 익명희망 양 덕분에 만난 그 사람은 내 가난한 상상보다 서른 배는, 삼백 배는 더 멋있었다.

 

  생각한다, 머릿속에선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던 사람이었는데 실제로는 처음 보자마자 살짝 실망했는데에도 불구하고 그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순간 깨달았다. 어떤 상상도 현실보다 강렬할 순 없다는 것을. 그건 그림으로만 알던 바다를 처음 보는 아이와 같은 기분이었기도 하고, 매해 맞는 새 계절이 항상 새로운 것과도 같았다. 언제나 눈앞에 있는 순간 가장 경이로웠다. 키세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생각하는 건 드물었다. 이렇게나 두근거리는 것도 희귀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더 알고 싶고 조금 더 만나고 싶은 건 처음이었다.

 

  키세는 편지를 갈무리해서 책상 제일 위쪽 서랍에 넣었다. 이건 기념. 그리고 도로 풀썩 누워 오늘 반 친구들을 닦달해 그 사람에 대해 알아낸 걸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렸다. 키세는 이걸 위해 가진 바 모든 연기력을 총동원했다. '이런 힘든 일을 도와주신 선배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게다가 초능력자 선배라니 이런 우연이 있나요' '후배 된 이로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사람도 아닐 거예요' '저희 부모님이 저 그렇게 막돼먹은 료타로 저 키우신 적 없어요' 등 갖은 유리가면을 써가며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보이도록 노력해 정보를 닥닥 수집했다.

 

  다들 키세와 같이 이제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학년들이지만 반 친구들은 드물게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해오는 키세를 위해 아는 바를 최대한 설명해주었다. 카사마츠를 안다던 남학생도 있었고 그 선배가 초능력자라 알음알음 이름이 있는 덕에 나름 기본 정보는 모였다.

 

  카사마츠 유키오, 카이조 고교 3학년. 중학교 때는 육상부였고 지금은 교내 밴드부의 기타리스트. 취미는 역시 음악. 성격은 엄하고 곧지만 뒤로 잘 챙겨주는 상냥함도 있다는 평판. 친구들로부터 신임도 좋다고 한다.

 

  뭐가 그리 좋은지 키세는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간질간질해져서 또 침대에서 괜히 발을 버둥거렸다. 첫사랑하는 중학생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은 키세와 마찬가지로 초능력자야. 발현도 일찍 했으니 아마 에스퍼로 국가 등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키세가 소속되어 있는 연구소는 국내에서 가장 큰 연구소로, 그곳의 중요한 인재이자 어지간한 연구원만큼 소속 경력이 긴 키세가 조르고 요청하면 아마 불법이 아닌 선에서 어느 정도까진 카사마츠의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연기까지 적극적으로 해가며 알려고 들던 거에 비해 키세는 연구소에 연락하진 않았다. 어쩐지 그건......그 사람이 만약 알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연구기관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키세는 신나게 휴대폰을 들었었다. 그리고 아는 연구원의 번호를 누르려던 그 순간, 그 사람의 눈이 문득 떠올랐어. 자신을 똑바로 쏘아보던 그 눈이. 그리고 키세는 휴대폰을 다시 닫았다, 그랬었다.

 

  키세는 생각한다. 아마 자신은 앞으로, 몇 번 더......아니 더 여러 번,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이 자신을 보던 눈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주말은 연구소에 한 번 가야한다. 그리고 잡지의 인터뷰도 하나. 후자는 금방 끝난다. 그러면 시간이 조금 남겠지.

......한번 만나달라고 해볼까. 이번 주 중에 그 사람의 교실에 찾아가는 거야. 몇 반인지 이제 아니까 조심스럽게 찾아가서, 오늘 감사했다고 인사를 하는 거다. 그리고 제대로 답례를 하고 싶으니 잠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랑...... 으아아 무슨 데이트 신청도 아니고!! 키세는 베개를 껴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왜 이러냐, 료타! 스스로에게 태클을 걸면서도 키세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었지만 키세는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멋지게 상상해도 직접 만난 그 사람은 이보다 수백 배는 멋지겠지, 하고. 그러다 문득 다시 깨달았다.

 

 아, 그래. 이제는 '그 사람'이 아니구나.

카사마츠 선배야.

 

 키세의 머릿속에서 빛이 또 파바박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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