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집에 있는 커피만화 제목이 맞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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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첫 주는 대체적으로 느슨해서, 란타로는 공강시간마다 멀찍이 있는 교내서점이나 학생식당으로 질주하는 일 이외에는 꽤 슬렁슬렁 3일을 보낼 수 있었음. 조금만 늦어도 줄이 쫙 길어지니까 달려야함ㅋㅋㅋㅋㅋ
과 선배들 소개도 받고, 새내기라고 귀염도 받고, 동기들끼리 잠깐 모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캠퍼스 라이프였음. 또 며칠간 신입생 환영회니 뭐니 일정이 쫙 잡힘.
그 전에 란타로는 계속 열리고 있는 동아리 홍보회-기간도 길고 해서 반쯤은 축제분위기- 쪽을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음.
거의 3주 가까이 되니, 친목동아리, 전문동아리, 학외단체, 종교 등등이 약간 기간을 나누는 영향이 있다고 선배한테 들었기 때문임. 그리고 친목은 기간 초기에 강세를 두었음.
란타로는 어릴 때 부터 미술이 취미였음. 학교 미술시간에, 학원에 다닌적은 없다는 말에 미술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
하지만 란타로는 집이 약국이었고, 가업을 이을거라고 쭉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진로를 잡을 생각은 처음부터 그다지 없었음. 또 그림 그리는 건 취미로서 좋아하고 싶었기도 하고...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색연필이나, 특히 수채화를 좋아했음.
그래서 동아리도 미술관련- 수채화 동아리를 들어볼까, 하고 생각했다.
란타로는 관리부스에서 받은 동아리 안내책자를 뒤적이면서 미술, 그림..수채화..수채화...를 찾으며 천천히 각 동아리의 홍보로 시끄러운 광장을 걸었음.
정말 반쯤은 축제처럼 주위는 소란스러웠음.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해 자기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외치고 있었음.
"신입생 여러분!! 사진 동아리는 어떠세요!! 대학생활, 예술적 교양을 쌓아 봅시다!!"
"새내기들이여, 입시로 굳은 몸을 이제는 풀어야 할 때!! 오라! 베이스볼!! 하얀 공을 쫓아 플라이이이!!"
"일단 와봐!! 일단 오면 좋다니까 선배들이 잘해줄게!!! 여기 사인만 하면 돼!! 누나가 잘해준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 선배 오늘 카드정지 풀렸다!!!"
"뭡니까 이거 놓으십쇼!"
"아 일단 와서 여기 앉아봐, 응? 선배들이 좀 힘들어서 그래...인원수 못 채우면 OB선배들이 죽이려 들....아, 아니 일단 앉아서 주스 좀 마셔 자자"
홍보보단 절규나 강압에 가까운 외침들이 들렸음 란타로는 주슨지 뭔지를 신입생한테 억지로 퍼먹이고 있는 미식축구 부스를 슬슬 피하면서 미술관련 단체가 모여있을 라인을 향해 걸었음.
중간중간 부스 근처를 얼쩡거리다 그대로 납치 비슷하게 당하는 장면이 보였음.
란타로는 긴장했음. 왜냐면 란타로는 거절을 잘 못하니까.... 본인도 자기 성격을 잘 알았음.
그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음.
"찾았다!!"
이런 소란통이라 란타로는 자기한테 거는 말이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바로 등 뒤에서 너무 크게 외치는 소리였던 바람에 우선은 깜짝 놀라 뒤를 확 돌아봤더니.
란타로는 정말 놀랐다. 바로 눈 앞에 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딱 서서 자기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거든.
어억 심장 떨어졌어!! 란타로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물러서려고 했다.
"바로 너야!"
"...네?"
"우리가 찾아온 바로 그 사람! 인재!"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
"일억이천년 전부터 그저 기다려왔어, 너를!!!"
아마도 선배나, 연상일 듯한 그 남자는 물러서려는 란타로의 팔을 딱 잡고, 숫제 옆구리에 단단히 껴서 붙잡은 채 뭐가뭔지 어리둥절한 란타로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한데다 사람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호구같...아니 순박한 성격의 란타로는 뭣도 모른채 그대로 끌려갔다.
아까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던 납치 피해자들이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몇번 다급하게 어어, 저는, 사실 가고 싶은 동아리가 따로....., 저기요, 죄송한데 잠깐 제 말 좀..... 하고 말을 걸어봤지만 남자는 신나게 웃으면서 팔천년 지났을 즈음엔 더욱더 그리웠어!!! 같은 이상한 말을 외칠 뿐이었다.
뭐가뭔진 모르겠지만 이런 선배가 있는 곳이라면 할 수 있는한 단호하게 거절해봐야지, 하고 끌려가면서 란타로는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았다.
남자는 사람들을 헤치며 광장의 오른쪽 끝으로 란타로를 끌고갔는데, 질질 딸려가던 란타로는 어느순간부터 뭔가 이것저것 복잡한 것들이 섞인 듯한 냄새를 맡았다.
뭔가 다양한 음식들이 잔뜩 있는 듯한....하지만 그 중에서도 란타로가 이게 뭔지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곧바로 구분해낼 수 있었던 향기가 있었다.
바로 커피향기였디.
란타로는 순간 커피향이다, 하는 생각에 은근히 포기하고 있지 않던 반항을 있던걸 살짝 멈췄다.
남자가 데려간 라인은 바로 음식이나 시음 쪽의 동아리들이 모여있는 라인이었다.
친목중심의 맛집탐방동호회나 살짝 전문성의 냄새를 풍기는 중화요리연구회 베이커리, 라면동호회, 다도문화연구회, 전통주나 와인연구회 etc...같은 것들이 우르르 있었다.
이런 곳은 홍보를 위해 시음이나 시식 이벤트를 하는 곳이 있어서, 사람들이 상당히 몰려있었다.
남자는 란타로의 팔을 끌어 어느 한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란타로는 어색한 자세로 끌려가면서 몇 사람이 앉아있고 몇 명이 주위에 모여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여러색의 색지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갈색종이(뒤에 판을 대서 고정시켜놓은)에는 바른 글씨로 크게, 동아리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커피시간]
-00대학교 커피동호회-
그리고 글자 아래엔 약간 삐뚤게 김이 나는 커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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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이것봐! 내가 뭘 가져왔게?"
"저기, 최소한 사람으로라도 취급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남자가 란타로를 끌고 들어가며 외치자마자 천막 안쪽의 사람들의 시선이 다 두사람을 향해 쏠렸다.
이윽고 환성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란타로의 실날같은 대꾸는 쉽게 파묻혔다.
"신입생이다!"
"뉴비다!!"
"보송보송해!!"
"새로운 제물이다!!"
"기념으로 갈자!!!"
"갈아요?!!"
제물부터 태클을 걸고 싶었는데 뒤이어 들린 끔찍한 말에 란타로 기겁함. 사람을 다짜고짜 납치해 끌고오질 않나, 물건취급을 하더니 이젠 뭘 어쩐다고요?
대학의 동아리란 내가 알고 있던 그 동아리가 아니라 동아리의 철자를 살짝 바꿔야 말이 될 법했음.
더 기가찬건 굳이 여기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들도 분위기가 비슷했다는 거였음.
란타로는 동아리 생활로 자신의 캠퍼스 라이프를 풍요롭게 해보려했던 의욕이 삽시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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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륵드륵드륵
사람에 따라선 듣기 좋게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음.
".......간다는 게 커피 콩을 간다는 얘기였군요...."
"우린 커피동아리니까. 뭐 좋아하는 종류 있어, 신입생? 웬만한건 다 있어."
홍보기간이라 힘 좀 썼거든.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2학년의 노세 큐사쿠라고 소개한 선배가 손잡이를 몇 번 더 돌렸다.
"아무렴, 우리들도 모자라서 오비선배들한테까지서 소장품을 죽죽 뽑아냈잖아. 이제 우리집엔 커피 찌꺼기밖에 없어."
온수 담당인지, 전기포트와 휴대용 가스렌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남자가 투덜댔다. 큐사쿠는 발로 동기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조용히 해, 사콘.
"신경쓰지마. 이건 저쪽 시음회 거고.... 잘 마시는 거 있어? 커피 좋아해?"
"아, 괜찮은데."
"뭐 가입한다든가, 그런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우린 원래도 잠깐 앉았다가 가는 사람이 많거든"
확실히.
큐사쿠의 말에 란타로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으로 이 라인은, 특히 차 종류는 시음 이벤트 덕인지 부스 길이도 책상 하나분은 더 있었고 란타로가 앉은 옆 자리에서도 다른 회원들이 쉴새없이 밀려드는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느라 바빴다.
란타로가 우물쭈물 엉덩이를 붙인 자리는 이런저런 준비를 하거나 신청서를 같은 걸 작성하는 자리인 듯 했다.
낯선 곳에서 적응을 못해 영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짓는 란타로를 향해 큐사쿠는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 선배가 대답도 안 듣고 그냥 끌고 왔지? 조금만 들뜨면 자주 막무가내가 되는 사람이라."
정 불편하면 사과의 뜻으로 한잔 대접하는 걸로 하자. 괜찮지?
하고, 살짝 딱딱해 보였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1년 선배는 파릇한 신입생을 향해 너그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자신을 납치한 무작시런 선배랑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란타로는 어쩐지 감격스런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게 바로 선배지...!
"커피는 어떤걸로 할래? 기왕 납치당한거, 좋은 걸로 줄게."
"아...그게. 저, 사실은 커피는 잘 모르는데요......"
뭐든 편하신 걸로. 하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란타로는 그런 일견 고급스러워 보이는 취미는 없었던 것이다...
카페라떼가 좋아요 하려 했다가 큐사쿠와 사콘의 뒤쪽에 나열된 통들의 라벨에, 뭔가 어디서 들어보기는 한 듯한 외국어들이 줄줄이 적혀있어서 얼른 말을 삼켰다. 우유의 첨가여부를 묻는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괜히 아는척 하는 것보단 솔직하게 말하자. 란타로는 약간 쑥쓰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1년새 닳아버린 선배들의 가슴에 와 닿았나보다. 순수함을 향한 감탄이 터져나왔다.
"우와, 역시 새내기야!!"
"강아지 같다."
그리고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란타로를 푹 끌어안았다.
란타로는 앉아있었고 상대는 선 채로 끌어안은 덕에,0 꽉 감싸안긴 란타로는 고개도 못돌린채 앞으로 반쯤 고꾸라졌다. 어억
"오오, 머리가 부슬부슬."
"아야베 선배, 복슬복슬이 아니구요?"
"둘 다 사람 머리에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란타로의 뒤통수에 턱을 얻고 비비적거리는 아야베와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사람을 보고 노세 큐사쿠가 한숨을 쉬면서 대꾸했다.
란타로가 위에서 짓누르는 무게에 허리도 못 들고 낑낑대자, 큐사쿠는 엄한 목소리로 아야베 선배, 애가 힘들어하잖아요. 산탄다 선배도 보고만 있지 마세요.
옆에서 뭐라 말하든 듣고 있지 않느니라 하는 표정으로 란타로의 위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 아야베를 카즈마가 억지로 일으키면서 대신 사과했다.
"미안. 나도 아야베 선배도 새내기는 역시나 귀엽구나~ 싶어서 말이야."
"맞아. 지금 2학년들도 작년엔 귀여웠어."
"네네. 지금은 안 귀여워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거짓말이야. 큐사쿠는 지금도 귀엽"
"됐다고요!"
소리를 빽 지르며 선배를 향해 로우킥을 날리는 큐사쿠를 향해 주위사람들이 왁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야베는 얻어맞은 종아리를 다른쪽 다리로 몇번 문지르더니, 신음소리와 함께 허리를 펴는 란타로의 머리를 다시 콱 눌렀다. 이번에는 손으로 잔뜩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이 뉴비는 누구?"
"뉴비죠. 학교 뉴비긴 한데 우리 뉴비가 되는 건 몰라요.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앉혔어요."
아직도 얼굴을 붉힌 채 전투적으로 커피콩을 분쇄하는 큐사쿠를 대신해 뒤에서 사콘이 대답했다. 흠, 그래.
길가던 개를 쓰다듬어도 이보다는 상냥하게 만질 것 같이 제멋대로 머리카락을 흩친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퍽퍽 소리가 날 것 같다. 란타로는 이 엄청난 마이페이스에 뭐라 반항도 못하고, 완전히 굳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역시, 란타로는 이런 막무가내인 타입에 많이 약했다.
난 진짜 주위에 너무 쉽게 순응하는 것 같아. 란타로는 어째 아까도 이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타카마루 형이 데리고 왔지?"
카즈마가 난처하게 웃으면서 란타로의 머리에 이젠 거진 두피 마사지 비슷하게 하는 아야베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살았다! 머리를 쥐어 뜯기는 줄 알았어)
아야베는 여전히 주위에서 뭘 어쩌든 나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란타로를 한번 쳐다보고는 큐사쿠를 향해 말했다.
"맞아요, 사이토 선배가 어디서 납치해왔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큐사쿠는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이상한 모양의 컵에, 사콘에게서 넘겨받은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으면서 물었다. 물어보면서도, 아야베쪽은 쳐다도 안본다.
아무래도 이 동아리는 위아래가 썩 콩가룬가봐. 무자비하게 갈린 저 까만 콩들처럼......란타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얘 머리카락이 커피색깔."
아야베가 짧게 툭 내뱉었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이 끝난 순간, 란타로는 사바나에서 하이에나 떼에 둘러쌓인 가녀린 영양새끼가 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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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타카마루라고 불린, 란타로를 유괴해온 노란머리 선배는 시음회 쪽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큰소리로 웃거나 뭐라뭐라고 설명하거나 하는데, 또 들떠서 뭔가 오버하려하려 하다가 옆에 있던 후배같아 보이는 사람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자신을 붙잡고 흔드는 수많은 손들 틈 사이로 힐끗힐끗 보며 란타로는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히는 새끼영양을 생각했다.
걔도 나도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지. 가엾은 영양아....... 싸한 커피향기가 나는 사바나는 완전히 흥분한 짐승들의 세상이었다.
"정말! 정말이네! 왜 아깐 몰랐지?! 갈색머리로 염색한 사람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예쁜 색깔은 처음 봐!"
"사이토 선배가 간만에 좋은 일을 했네요! 아, 가입 이후로 처음인가?"
"카페오레? 아니면 카페라떼?!"
"난 00브랜드 캔커피 마일드!! "
"난 00회사거."
"이거 천연이지? 짱이다! 염색한 걸로는 이런 부드러운 느낌이 안나!! 내가 도전해봐서 알아."
"너 작년에 그래서 그 꼴을 하고 다녔던 거야?"
흥분한 사바나의 축생들은 어린 후배를 둘러싸고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란타로는 선천적으로 머리색이 연했다. 고등학생이 되자 완연히 갈색인게 너무 티가 나서, 본인도 친구들도 다 혹시 학교에서 오해를 사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학교 선생님들까지 함께 걱정해줄 정도로 란타로는 인망이 뛰어나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애 인상이 너무 순박하고 성실해보이는데다 어째 분위기가 갈색머리인게 어색하지 않고 굉장히 자연스러워, 처음보는 사람들도 순간 갈색머리카락이라고 인식을 못하기도 했었다.
말해주면 .....아, 그러고보니! 하고 어째 새삼 깨닫는다....정도. 덕분에 억지로 검은색으로 따로 염색을 하지 않고도, 란타로는 쭉 평범하게 지내올 수 있었다.
그래도 커피색깔이라니.
자기 머리색이 연한건 알고 있지만 커피색깔이라는 그런 낯간지러운 생각은 태어나서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데.
이 동아리는 무섭다. 피해야 한다.
란타로가 느끼는 공포는 오덕들 사이에 끼인 일반인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사실 썩 다르지도 않고.
아무리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도, 이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된다, 단호히 거절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커피도 거절하고저는 미리 생각해둔 다른 동아리가 있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란타로는 드물게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선배들은 이제 숫제 란타로의 머리카락을 번갈아 만져가며 어느 회사의 캔커피와 제일 비슷한지 토론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천사의 유혹' 쪽으로 판세가 기울어져 있다)
"저- 실례합니다?"
그 때, 선배고 뭐고 다 떨쳐내고 이 타이밍에 의자에서 일어나자 싶던 란타로의 귀에 흥분한 덕들의 토크와는 다른, 어디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하이에나들이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광경에 약간 놀랐는지 안에 들어가도 되는건가 고민하는 듯, 살짝 어색하게 천막의 경계에 선 늘씬한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라, 이나데라 씨?"
"......아! 셋츠노 키리마루 군."
남자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란타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도를 잘 보던 키가 큰 남학생. 셋츠노 키리마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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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모집기간의 동아리들은 누구든 가까이 오면 일단 의자에 앉히고 보는 버릇이 있다.
키리마루도 눈에 띄이자 마자 단박에 플라스틱 의자에 끌어 앉혀졌다. 우연찮게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은 얼떨떨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고 하면 서로 동질감도 들고 좋겠지만 키리마루는 어째 이런 광경이 아주 처음은 아닌 듯, 꽤 자연스럽게 -그건 성격탓도 있겠지만- 앉아서 내미는 커피를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역시, 자신은 이 동아리가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일전에 만났을 때 있지? 그 때 동아리관의 여기 동방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어."
아, 그래서 정문이나 후문 쪽이 아니라 학교 안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던 거구나. 란타로는 3일전의 일에서 느낀 궁금증을 이제야 조금 풀었다.
신입생이다! 뉴비다!! 누군데?! 왜 일전에 찾아왔던 고양이 눈!! 왜 OB인 그 선배하고..... 하고 또 정신없이 떠들던 선배들은 이벤트 쪽의 사람들에게 너네는 일 안하냐고 혼쭐이 나더니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야베라고 불린 마이페이스의 선배만 어디론가 슬쩍 사라져버려서, 후배들에게 갖은 욕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쪽은 꼴이 왜 그래?"
"나도 몰라....."
붙잡혀서 흔들린 탓에 옷도 엉망이고, 특히 머리카락은 엄청나게 엉망이었다. 란타로는 한숨을 쉬며 고생한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는데, 그 손이 닫기도 전에 다른 손이 올라와서 머리카락을 탁탁 털어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길다란 손가락이 옅은 색의 머리칼을 가볍게 정돈한다.
"여기 선배들 좀 이상하지 않냐? 나도 일전에 잠깐 봤다가 무슨 새끼 영양같은게 된 기분이었어. 사자 떼에 둘러쌓인."
이쪽은 이미 한번 겪어봐서 그런지 비교적 익숙해보인다. 바로 앞에서 또 다른 커피에 집중하는 선배의 귀에 들리지 않게, 키리마루는 몰래 속삭였다.
좋은 사람들 같긴 한데, 사람 좋은거랑 이상한 거랑은 다르다는거 완전 깨달았어.
어느새 손은 내렸다. 란타로는 아까보단 정돈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 눌렀다.
키리마루의 행동은 어딘가 극적이거나 과장됬다는 느낌이 있어, 전부 슬쩍 장난을 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더라도 딱히 뭐라고 일일히 대응하기가 애매하다.
란타로는 다리를 꼰 채로 종이컵에 입을 대는 키리마루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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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웠던 사이에, 수업시간이 시작됬는지 시음 이벤트 쪽도 사람이 많이 줄었다. 몰려드는 손님들-공짜커피긴 하지만-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사이토 타카마루가 드디어 몸을 빼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기가 유괴해 놓고는 정작 피해자를 얼마나 버려둔거람. .....물론 도망은 못 갔지만서도.
"우와, 기다려줬구나, 우리 네쓰비 마일드!!"
"이젠 딴지걸지 않을 테니 좀 만 더 비싼 브랜드로 쳐주세요."
란타로는 환호하며 양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노란머리 선배를 냉정하게 쳐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이 양반이 오늘의 이 모든 고생의 원인이다!
끄잉....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이 선배다운 위엄이라곤 어림팔푼도 없었다.
허공을 휘저은 팔을 안타까워하던 타카마루가 란타로 옆에 앉아서 웃고 있던 키리마루를 발견했다. "큐사쿠 군, 이 쪽은?"
"아, 그 쪽이 걔에요. 왜, 그저께 선배 안 계실 때 왔다던 도이 선생님네의......"
"네가 셋츠노 키리마루 군이야?!"
큐사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카마루가 눈에 빛을 켜고 달려들었다. 도이 선생님께 얘기 들었어. 내 얘기도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 사이토 타카마루 .....선배?"
"응! 도이 선생님이랑은 OB이실 때 자주 만났었어."
"이야아, 안녕하세요! 선생님께 말씀 자주 들었어요. 최근엔 자주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고...."
키리마루가 웃으면서 맞장구 쳤다. 금방 서로 어깨도 두드리고 악수도 하고 난리가 났다.
미처 몰랐던 다른 멤버들도 오오, 나도 들어봤어 걔가 얘야? 도이 선생님이 누군데? 왜 커피머신 2호 사다주셨다던 그..... 오오. 금새 시끌시끌해졌다.
....완전 커피오타쿠라고요. 라고 덧붙인 뒷 말은 란타로한테만 들린 듯 했다
"마침 조금 한가해졌고, 우리 뉴비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좀 해볼까."
큐사쿠가 조금 목소리를 키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무래도 산만한 분위기를 수습하는 역할인 듯, 선배들을 잡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리마루는 자리를 다시 잡아 앉았으나, 란타로는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점점 더 빠져나가기가 힘들어 지고 있다. 게다가 선배들 소개까지 받으면 더더욱 나오기가 벅차질 건 당연한데......
이럴 때 만큼은, 이 손해보기 딱 좋은 성격이 원망스럽다.
일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반, 도저히 이 환영하는 분위기를 깨지 못하겠다는 마음 반이라 빈 컵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아 어쩌면 좋냐.
"나는 2학년의 노세 큐사쿠. 부족하지만 동아리 부회장이야."
"부회장, 좋아하는 커피는 뭡니까-"
"과테말라 SHB !!! 특히 추운 겨울에 나카자이케 선배 네에 가서 곧바로 내려주시는게-"
그 뒤로 큐사쿠는 한참 동안 풍부한 바디감이 어쩌고 밸런스가 저쩌고 누구 선배의 손은 마법의 손 같다 블라블라........ 눈을 빛내며 떠들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두 뉴비의 표정을 깨닫고 나서야 입을 닫았다.
내가 하지말라 그랬잖아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채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든 노트를 휙휙 휘두르는 후배한테 대충 맞아주던 한 선배가 여전히 웃음을 띈 채로 한 발 걸어나왔다.
"큐사쿠는 저렇게 취향이 까탈스럽지만 신경쓸거 없어. 우리 동아리는 핸드 드립부터 자판기 커피까지, 모든 커피를 다 취급하거든."
"사이토 선배도 캔커피 마니아야."
"난 핸드드립도 인스턴트 커피도 좋아해!"
"그러시다네. 나는 우라카제 토나이고 3학년. 이쪽은 동기인 산탄다랑 칸자키."
"산탄다 카즈마야."
"칸자키 사몬이다."
앞머리가 조금 이상하게 뻗친 선배가 우라카제 토나이, 옆의 약간 부드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순한 인상의 선배가 산탄다 카즈마다.
그리고 이벤트 쪽에 있다가 방금 이쪽으로 걸어온 씩씩해 보이는 느낌의 사람이 칸자키 사몬.
곧바로 란타로에겐 원흉이 되는 노란머리 선배가 사이토 타카마루라고 소개했고, 현재 4학년으로 휴학을 몇 번 한 탓에 나이는 더 많다고 한다.
온수 담당이던 머리카락이 가는 사람은 큐사쿠의 동기인 2학년의 카와니시 사콘이라고 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도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서 소개해 줄게."
카즈마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좀 특이한 사람도 있긴 한데, 다들 좋은 사람이야. 걱정할 거 없어."
"그래, 그래. 특히 뉴비라면 아주 치를 떨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들 많아. 나도 재작년 1학기 땐 지갑에 교통카드만 넣어 다녔다고!"
"맞아, 그래서 선배들이 사몬 욕을 많이 했어."
"진짜?!"
"어 진짜로."
'거짓말이야! 선배들은 날 귀엽다고 했어.' '지금 그 말 케마 선배한테 하면 주먹을 날릴거야.' '왜?!' '귀척한다고.' '지금 물어보러 가겠어!' '어, 야, 사몬 어디가!!'
'에이 달려갔잖아... 저거 어쩌지?' '괜찮아, 나중에 사쿠베가 잡아서 데리고 와줄 걸' '아 커피마시고 싶다' '드려요?' 'ㅇ쓰비' '있는 걸 드세요 이 양반아' ...............
키리마루는 붙임성있게 맞장구를 쳤지만 란타로는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아, 진짜 무리다.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오는 건.
자기들끼리 만담 비슷하게 하면서도 가운데 두 사람을 딱 두고 있다. 다들 개그지향인 줄 알았는데 스릴러도 소질이 있는 듯, 뉴비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에워싸고 있는게 분명했다.
천막 주위를 채우고 있던 커피향이 이제는 많이 나지 않는다.
잠시 앉아있었다고 그새 코에 익숙해졌나보다.
이 동아리에도 이렇게 어영부영 들어가게 되면 어쩌지? 아아, 나의 풍요로운 캠퍼스 라이프의 첫단추가.......
"야아, 선생님께서 동아리는 하나 들어보는게 좋다고 당부를 하셔서요. 사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와봤는데....커피같은 것도 잘 모르고 말이에요."
상념에 빠져드는 란타로의 귀에 키리마루의 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 동아리 괜찮지? 커피도 공짜로 주고. 하는 말의 대답이었던 것 같다.
"뭐, 어려운 건 몰라도 돼. 우리도 잘 모르고 왔거든."
"카페인 알레르기라던가 그런 것만 아니면 돼."
"그건 진짜 안 되는 거고요!"
3학년 둘과 사콘이 몇마디 거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긴 자판기 커피도 좋아하거든. 커피 마실 수만 있으면 오케이. 자세하게 안다거나 되게 좋아한다면야, 물론 좋겠지만.....
어차피 전공도 다 다르고, 사실 가지고 있는 취미들도 다른 사람들도 많아.
모처럼 대학이라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으니까, 이제까진 관심이 적었던 새로운 무언가에 한번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일이야. 동아리라는게 계기가 된다면 좋겠지.
그냥 그 정도 마음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토나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조가 차분해서 그런지, 어째 굉장히 마음에 스며드는 것 같다.
우와, 정말 선배같다. 2년 연상일 뿐이지만, 분명 2년치의 경험을 후배에게 사려깊게 충고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어느샌가 따라진 두번째 커피 잔을 입에 대며 란타로는,
.............귀가 팔랑이는걸 느꼈다.
미술은 어렸을 때 부터 내내 해왔지. 입시 끝난 후 잠깐 뿐이지만 학원도 한번 다녀봤었고.
하지만 커피라니, 이제까진 시험기간에 마셔본 캔커피나 가끔 친구들과 가는 동네 카페에서 열심히 메뉴판을 보다가 결국은 카페라떼를 시키던게 전부다.
새로운 무언가라.
또, 이제서야 새삼 깨달았는데 옆에 앉은 이 사람과는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온 곳에서 또 다시 만난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전화번호라도 교환하자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려 보냈던 그저께가 기억난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쌉싸래한 커피 향이 다시 코에 닿았다. 핸드 드립이라고 하던가, 이런걸.
정말 좋은 냄새가 난다.
"-라는데, 이나데라 씨. 어때? 나는 적을건데."
란타로의 눈 앞에 불쑥, 눈 앞에 종이 하나가 펄럭였다.
"어, 어어?"
"나는 일단 우리 선생님 추천이라서. 넌?"
"아, 난....."
키리마루가 들고 팔랑거리는 건 동아리 가입 신청서였다. 어느샌가 셋츠노 키리마루, 사범대 유아교육과, 가입동기는 '분위기가 좋아보였기 때문에' 라고, 쭉 뻗는 시원시원한 글씨체로 쓰여있었다.
가입동기가 정말 대충 적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란타로는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선배들은 생각을 망설일 틈을 주지 않았다.
"자아, 무엇을 망설이나, 후배! 남자답게 적어."
"그래, 네가 이제부터 우리 동아리 마스코트야, ㅇ쓰비야."
"사이토 선배, 제발 입 좀 다무세요."
"우선은 이름만 적어도 돼. 우리는 활동에 엄격한 동아리도 아니니까, 에...............으음?"
친절하게 제안하(하지만 종이를 내밀고 란타로 손에 펜을 꽉 쥐어주면서) 던 큐사쿠가 중간에 말을 멈췄다.
란타로를 구슬리던 선배들 모두가 순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각자 미친듯이 손을 휘젓고 입만 뻥긋거리며 텔레파시를 주고받다가, 뭔진 모르겠지만 의견 교환에 실패하고는, 다들 조심스럽게 란타로를 향해 고래를 돌리고 대표로 토나이가 물었다.
"........저기, 너 이름이 뭐더라?"
"이나데라 란타로입니다."
란타로는 한숨을 쉬며 가입 신청서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키리마루와는 번호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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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가입했다
-큰일났다 커피는 하나도 모르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큰일
-여기서 란타로 머리는 카페라떼 색......에 비슷하진 않은데 색이 밝은 갈색이 아니고 좀 가라앉은 연한 갈색. 거기에 천연색이라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부드러워서
색 자체보단 전체적인 인상이 네쓰비 마일드 같다고 타카마루가 느낀 것 같다.
-아마도?
-왜 중간에 말투가 바뀌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모란...정말 잘 만들었어.....5년간 한 일 중에 제일 잘한 일로 꼽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