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마루가 또 어디선가 얻어온 쌀과 누군가에서 받아온 된장과 어느 개울가에서 뽑아온 풀들로 여느때와 같은 저녁을 차렸다.
"정말 재주도 좋다니까-"
도이 한스케는 조금씩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된장죽의 거품을 세어보며 말했다.
냄비 맞은편에 앉은 소년은 전체적으로 어딘가 날카롭고 날렵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지만 그 행동이나 백중 한두번을 제외하고는 꼭 매를 버는 입방정은 그야말로 두루뭉술하고 사교성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여느때처럼 키리마루는 과장되게 으쓱하며 대꾸한다. 제 수완이 다 좋아서 그런거예요, 에헴.
키리마루라는 소년은, 편의상 '셋츠노'라는 성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성도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고아이다.
그 출신과 어린나이부터 홀로 자신을 책임지며 살아온 환경때문인지, 키리마루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남을 의식하고 반응을 살피고, 겉으로 드러내는 것과 속에 간직해야 할 것을 구분한다.
게다가 나이에 맞지않게-이미 충분히 맞지 않지만 그 수완과 능력은 상당해서, 조그만 아이가 짓는 웃음이 노련한 장사치를 보는 것 같다. 겉웃음이라는 거다. 아이를 보는 어른으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이가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익혀온 처세술이다. 비난할 수는 없었다. 도이는 국자로 그릇에 죽을 퍼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키리마루."
"왜요?"
"넌 커서 뭐가 하고 싶니?"
그 질문에 키리마루는 오늘 오전, 아르바이트가 없는 틈을 타 재빠르게 답안지를 채워넣은 여름방학 숙제를 떠올렸다.
시작할 때는 각잡고 제대로 머리를 써서 열심히 풀어보려 했지만 1번 문제에서 고전하고, 2번 문제를 읽기도 전에 질려버려 남은 문제들은 그야말로 빈 칸 채우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드문드문 기억나는 관련 단어들을 써넣었는데에도, 나중에 숙제집을 훑어보던 도이 선생님은 절반도 읽지 못하고 배를 부여잡은채로 엎어졌다.
훌륭한 닌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 또 배를 감싸안으시겠지. 오늘 얻어온 된장은 특별히 옆집 아줌마 일을 도와주고 얻어온 비장의 된장이었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기도 전에 위통을 일으켜서 된장죽의 냄새만 맡게 된다면, 그건 선생님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키리마루는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엄청난 아르바이트생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
그럼 그렇지. 도이 한스케는 또 한숨을 쉬었다.
아마 아이는 보통의 다른 아이들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적을 것이다. 아이들이 진지해봐야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지만, 친구인 란타로처럼 훌륭한 닌자가 되겠어요, 라던가 신베처럼 가게를 잇지 않을까? 라는 것처럼 형태화된 상상이 키리마루에겐 없었다. 키리마루는,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숨가쁘게 살아온 것이다. 머나먼 미래보다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삶을, 너무나 일찍부터 살아와 이제는 그게 버릇이 되었다.
키리마루는 도이선생님의 한숨이 맘에 들지 않아 괜히 국자를 험하게 다루며 샐쭉였다. 제 나름으로는 그래도 가장 무난하게 대답한 것이다.
나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토라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키리마루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럼 선생님은 나중에 뭐가 하고 싶은데요?"
"나?"
"계속 닌술학원 선생님만 할거에요? 박봉인데, 그렇게 선생님만 하다가 결혼도 못하고 늙으면 나중에 누가 제사지내주악!"
"넌 항상 그 한마디를 줄여야 해"
역시나 한대 맞았다. 어른의 긴 팔을 시원스럽게 죽 뻗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밤을 먹였다. 키리마루는 얼얼한 머리를 감싸안고 몸을 말았다. 우우 아파. 도이 한스케는 마찬가지로 아린 주먹을 쓰다듬었다. 뒤에 이어진 건방진 말엔 응징을 해줬지만, 앞의 말에는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떠오르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 생각을 했다. 얼마 전부터.
이제는 아프다고 데굴데굴 굴러도 도이 선생님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기 때문에, 키리마루는 뭐라고 꿍얼거리며 금방 몸을 일으켜서는 그릇을 들고 있었다. 키리마루의 동그란 어깨, 통통한 볼, 부드러운 머리카락, 또래보다 늘씬한 키
그리고 또래답지 않은 까칠하고 메마른 정서. 가장 처음 만난 친구가 순한 성격의 란타로와 신베라, 그렇게 셋이서 줄창 어울리는 사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점점 순화되어 지금은 처음과는 비교도 안된다. 속을 숨기는 데 능숙한 아이라 겉으로는 그다지 차이가 없지만, 1학년 하반 아이들의 모든 것을 낱낱히 꿰고 있는 그에게 그 변화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말이지......"
죽을 한숟갈 입에 넣으려던 키리마루의 손이 멈칫했다. 아이와 선생의 시선이 마주쳤다.
"나중에 너희가 졸업하고 나서,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있다가 학원을 나올거야."
"나와서 뭐하실 건데요?"
동그란 얼굴이 갸웃 기운다. 학교를 나갈 거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졸업한 후라 다행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얼굴에 금방 드러난다.
도이 한스케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슬쩍 웃었다.
"고아원을 차릴거야."
"......"
아이의 동작이 멈췄다. 순간 숨마저 멈췄던 것 같다.
수저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간신히 흘리지 않고 내려놓았다.
조용했다.
아니 조용히 중얼거리고 싶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선생님, 무슨, 그런, 어라 같은 의미없는 단어들이
간간히 들려왔다. 어느새 고개가 푹 숙여져 있었다. 동그란 어깨가 꾹 모여있다.
"어....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하신거예요?"
태연하게 묻는 것은 어린아이에겐 버거웠나보다.
도이 한스케는 쥐어짜듯이, 간신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찾고 찾다가 이어져 나온 아이의 질문에, 생각했다.
입학날 학비를 동전을 그득히 모아서 쏟아부은 아이를 처음 봤을 때. 첫 휴일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야한다며 무단으로 외출한 아이를 잡아챘을 때, 돈을 벌어야 학교에 다닐 수 있을게 아니냐던 외침. 멋대로 방바닥을 파서 저금을 숨기던 아이, 사복이 없어 자신의 옛날 옷을 혼자 바느질하던 아이, 돈이 최고라던 아이, 돈이 있어야 나도 있다던 아이.
첫 방학이 일주일 남았던 그 들뜬 분위기 속에서, 한발 떨어져 또래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
차갑다기 보다도 냉정하다기 보다도 포기했다기 보다도 그저, 아무것도 생각할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 때, 도이 한스케는 큰 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넌, 방학 동안에, 우리 집에 있는다.
아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던게 떠오른다. 언제나 입도 행동도 얄궃게도 에너지 넘치던 아이답지 않게, 놀라서 꼼짝도 못하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방학 도중에 또 무슨 말도 안되는 아르바이트를 할 지 상상도 안 가. 방학동안 얌전히, 내가 허락하는 아르바이트만 해!
이 때부터 슬슬 위통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절이라, 도이 한스케는 다른 하반의 아이들이 편애니 뭐니 하는 생각도 안 들만큼 합당한 사유를 외치며 이 말썽꾸러기 꼬마를 내려보았다.
키리마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쁨만이 가득한 아이의 웃음이었다.
도이 한스케가 대답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
팔을 뻗었다. 키리마루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손을 얹으면 그때서야 눈 앞의 이 아이가 너무나도 어리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도이 한스케는 조금, 웃고 말았다.